아니 가짜뉴스 좀 믿는다고 어디가 덧나요?
1938년 10월 30일 저녁. 미국의 CBS 라디오 채널에서 단막극 시리즈 '생방송 머큐리 극장(The Mercury Theater on Air)' 프로그램이 여느 때처럼 방송됩니다. 이날 네 번째로 준비된 극은 H.G. 웰즈의 유명 소설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었습니다. 웰즈의 원작은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화성인의 지구 침공을 다룬 SF 소설인데, 극의 배경을 1938년 미국 뉴저지로 바꾸고 마치 진짜 화성인 침공을 알리는 뉴스 방송인 것처럼 각색한 것이었지요. 참고로 이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하고 직접 나레이션까지 맡은 사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시민 케인 Citizen Kane』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오슨 웰즈(Orson Welles)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원작자와 이름이 비슷하군요. 영국의 소설가인 허버트 조지 웰즈의 성은 철자가 'Wells'입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실제상황이 아닌 단막극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렸지만, 문제는 중간부터 듣기 시작한 청취자들이었습니다. 라디오를 트니 난데없이 뉴저지가 공격받고 있다는 뉴스 방송이 구체적인 지명까지 거론하며 흘러나오고, 청취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웰즈의 연기력이 너무나도 뛰어났던 탓에 청취자들은 이 단막극을 진짜 뉴스 속보로 착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위협이 점점 부상하고 있던 1938년. 관공서에는 전화가 빗발치고, 사람들이 다급하게 피난길에 오르거나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등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급기야는 주방위군까지 출동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지요. 이 "가짜 라디오(Fake Radio)" 사건은 다음날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됩니다.
웰즈의 가짜 라디오 사건이 하나의 악의 없는 해프닝이었다면, 오늘날의 '가짜뉴스(Fake News)'는 시대를 규정하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웰즈의 시대보다 가짜뉴스가 훨씬 더 흔합니다.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가짜뉴스를 만들기도, 접하기도 너무 쉬워졌지요. 어떤 가짜뉴스는 어마어마한 해악을 끼치기도 합니다. 1998년, 영국의 의사인 앤드류 웨이크필드는 MMR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웨이크필드의 논문은 백신 반대 운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임의로 데이터를 조작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논문은 학술지에서 철회되었으며, 백신과 자폐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이미 안티백신(anti-vax) 도시전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진 뒤였습니다. 과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근거 없는 도시전설에 맞서 싸우느라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을 지경입니다.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이들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점은 명백한 듯합니다. 웨이크필드 사건이 발생시킨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가짜뉴스"라는 말 자체가 주로 비난의 의도로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지요. "다른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시대와 공간, 국경과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인 윤리 규범이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행동이나 다름없는 가짜뉴스 생산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파는 사람이 있다면 사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가짜뉴스 생산자들이 가짜뉴스를 계속 생산할 수 있는 이유는 가짜뉴스를 기꺼이 소비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안티백신을 믿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없다면 웨이크필드가 가짜논문을 아무리 찍어내더라도 그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미미한 수준에 머무를 것입니다. 객관적 사실보다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극단적 성향의 정치 유튜버들이나 사이버 "렉카"들도, 이들에게 별풍선이나 슈퍼챗을 쏴주는 시청자들이 있어야만 계속 가짜뉴스를 퍼나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행동만큼이나 가짜뉴스를 소비하는 행동 또한 나쁘다고 봐야 할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가짜뉴스를 소비하는 행동을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행동과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이 다소 무리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가짜뉴스의 소비자들은 가짜뉴스의 생산자와는 달리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속인 것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가짜뉴스 생산자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일개 시청자가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도 아닌데, 고된 하루를 마치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스트레스 해소 좀 하는 게 뭐가 그리 잘못된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문제가 우리가 오늘 다룰 주제입니다. 가짜뉴스의 생산이 잘못된 행동인 것처럼, 가짜뉴스를 소비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구독자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윌리엄 클리포드와 "믿음의 윤리학(Ethics of Belief)"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짜뉴스를 믿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19세기에 활동한 영국의 수학자 윌리엄 킹던 클리포드(William K. Clifford)입니다. 철학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루드윅의 원칙입니다만, 오늘만큼은 두 가지 이유로 예외를 두려고 합니다. 첫째, 클리포드가 오늘의 주제인 "믿음의 윤리학(Ethics of Belief)"이라는 이름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윤리학은 지각, 믿음, 앎과 지식을 연구하는 철학의 분과인 인식론(Epistemology), 그리고 도덕의 본성,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 등을 탐구하는 윤리학(Ethics) 양쪽에 걸쳐 있는 주제입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활발하게 논의를 이어가는 주제이기도 하지요. 둘째, 클리포드는 자신의 논변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공명할 수밖에 없는 탓에 이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클리포드는 1877년에 저술한 에세이 『믿음의 윤리 The Ethics of Belief』에서, 어느 선주(shipowner)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구독자님도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클리포드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잘못된 믿음은 때때로 크나큰 해악을 초래하므로, 우리에게는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믿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갑동 씨는 배의 침몰을 의도하거나 예견하지 않았니다. 심지어는 항상 해왔던 대로 했으니 이번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었습니다. 문제는, 갑동 씨가 형성한 이 믿음이 충분한 증거로 뒷받침되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갑동 씨는 증거가 아닌 추측과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했고, 이처럼 잘못된 믿음을 형성하는 바람에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클리포드는 이렇게,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클리포드는 더 나아가 대안적인 시나리오도 제시합니다. 이 시나리오는 기본적인 플롯이 (1)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가 침몰하지 않고 무사히 항해를 마칩니다. 그렇다면 이 시나리오에서 갑동 씨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달라져야 할까요?
클리포드는 "1도 그렇지 않다(not one jot)"고 하며 선을 딱 긋습니다. 클리포드에 따르면 갑동 씨에게는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믿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사고가 발생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순전히 우연에 달린 일일 뿐이고 갑동 씨가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믿음을 형성했는지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니까요. 운이 좋아 이번에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갑동 씨의 태도로 인해 다음 항해 때는 정말로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클리포드는 "책 읽기를 게을리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의무를 위반하는 자의 인생이 "인류에 대한 하나의 기나긴 죄악(one long sin against mankind)"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말합니다. (클리포드 또한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겨우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한 어조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클리포드는 이처럼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행동뿐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갖는 것 자체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믿음의 윤리학"을 둘러싼 논의의 터를 마련했습니다.
클리포드의 원칙을 보다 온건하게 일반화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증거에 바탕을 두어야 하고, 그 믿음의 강도는 증거에 비례하여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를 재진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는 증거주의(Evidentialism)라고 부릅시다. 클리포드의 원칙은 가장 순수하고 엄격한 형태의 증거주의(Strict Evidentailism)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클리포드와 증거주의에 따르면, 가짜뉴스를 믿는 일은 가짜뉴스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입니다. 의도적으로 타인을 속여서가 아니라,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데도 덥썩 믿어버림으로써 올바른 방식으로 믿음을 형성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위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증거주의의 딜레마
증거주의가 제시하는 원칙, 즉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증거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원칙은 꽤나 상식적이고 직관적입니다. 우리가 형성하는 믿음은 대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왼쪽 주머니에 핸드폰이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에 왼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기도 하고, 따뜻한 생강차가 인후통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목이 너무 아프면 생강차를 마십니다(저의 코로나 경험담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녀들의 백신 접종을 거부하기도 하고, 안전성 검사를 대충 해서 문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고 배를 출항시키기도 하지요. 믿음은 이처럼 우리의 행동에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며, 충분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짜뉴스를 믿는 행동이나 갑동 씨의 행동이 잘못된 이유도, 증거주의의 이러한 논변을 받아들이면 설명할 수 있게 되지요.
직관적인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증거주의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충분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이 사소하거나 무해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따뜻한 생강차는 저의 인후통 완화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생강차가 인후통 완화에 도움이 되리라는 저의 믿음은 몇몇 인터넷 게시물을 근거로 형성된 것이었는데, 나중에 의사선생님께 여쭤보니 그냥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것이 제일 낫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전문 의료인에게 질의하는 것이 최선의 증거를 얻는 방법인데도 고작 인터넷 글에 의존하여 생강차가 도움이 된다고 믿었으니, 저는 충분한 증거 없이 잘못된 믿음을 형성함으로써 증거주의 원칙을 위반한 셈입니다. 김갑동 씨와 달리 저의 믿음은 그 누구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았지만, 클리포드에 따르면 여전히 제 인생은 "인류에 대한 하나의 기나긴 죄악"이나 다름없습니다. 생강차 한 잔 마신 것 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강차 사례는 너무나 사소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반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성이 큰 믿음일지라도 별다른 해악을 초래하지 않는 경우를 제법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사례를 생각해 봅시다.
이상적인 투표자는 아무런 편견 없이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히 확인한 뒤 최선의 후보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병훈 씨와 비슷합니다. 공약을 세심히 확인하지 않은 채 N번 후보가 최선의 후보라는 믿음을 형성한 뒤 투표에 임하지요. 병훈 씨의 믿음은 분명 충분한 증거에 근거하여 형성된 믿음은 아니지만, 특별히 해악을 초래하는 행동이라거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증거주의의 원칙을 포기하여야 하는 것일까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병훈 씨의 사례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짜뉴스를 믿는 일이나 갑동 씨의 행동이 잘못된 점은 증거주의 원칙이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병훈 씨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공약을 세심히 확인하지 않은 채 믿음을 형성한 병훈 씨의 행동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 자체는 여전히 타당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증거주의 원칙의 강력한 호소력과 투표자 사례가 제기하는 문제 사이에서 철학적 딜레마에 처하게 된 듯 합니다.
의무의 차원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의무의 여러 차원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종종 "이다(is)"로 끝나는 문장과 "해야 한다(ought to)"로 끝나는 문장을 구별하는데, 이때 후자에는 규범성(normativity)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두 명제를 살펴봅시다.
(3)은 흑인과 백인에 관한 사실을 기술하는 "이다" 문장이지만, (4)는 흑인과 백인이 어떠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해야 한다" 문장입니다. (4)는 흑인과 백인을 평등하게 취급하여야 한다는 규범(norm)을 표현합니다. "해야 한다"로 끝나는 문장이 참이라면, 우리에게는 그 문장이 표현하는 내용의 의무(obligation) 또는 책임(responsibility)이 있음이 따라 나오게 됩니다. (4)가 참이므로, 우리에게 흑인과 백인을 평등하게 취급하여야 할 의무 내지는 책임이 있음이 (4)로부터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해야 한다"로 표현되는 규범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의 규범은 도덕 규범(moral norms)입니다. 예컨대 우리에게는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결코 피자에 파인애플을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우리의 도덕적 의무입니다.
도덕 규범이 아닌 규범들도 있습니다. 한 가지 예시는 법적 규범(legal norms)입니다. 법적 규범은 도덕 규범과 겹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법적 규범은 도덕 규범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피자에 파인애플을 올리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임과 동시에 불법적인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행동은 비록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일지라도 법을 위반하는 행동은 아닙니다.
이제 병훈 씨의 사례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는 앞서 병훈 씨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논했습니다. 왜일까요? 규범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병훈 씨의 행위가 도덕적 의무를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유형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증거주의를 따르는 어떤 철학자들은 병훈 씨가 위반한 규범이 도덕적 규범이 아닌 인식적 규범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즉,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믿어야 한다"는 의무는 도덕적 의무가 아닌 인식적 의무(doxastic/epistemic obligation)라는 것이지요. 이들에 따르면, 행위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거나 그릇될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은 인식적으로 올바르거나 그릇될 수 있으며, 인식적으로 올바른 믿음이란 충분한 증거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 즉 도덕적으로 정당화(morally justified)될 수 없는 행위이듯, 충분한 증거 없이 믿는 행위는 인식적으로 그릇된 행위, 즉 인식적으로 정당화(epistemically justified)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인식적 의무에 도덕적 의무와 구별되는 독자적 지위를 부여하는 논변을 우리는 "인식론적 증거주의(epistemic evidentialism)"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인식론적 증거주의는 클리포드의 원칙이 왜 병훈 씨의 사례에 적용될 수 없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클리포드의 원칙은 의무의 유형들을 구별하지 않으며,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에 믿을 의무"를 암묵적으로 도덕적 의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합니다. 클리포드가 제시한 선주의 이야기는 인식적 의무의 위반과 도덕적 의무의 위반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례이지만, 병훈 씨의 사례가 보여주듯 인식적 의무가 언제나 도덕적 의무를 수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 의무와 법적 의무가 때때로 겹치긴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닌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론적 증거주의에 따르면, 병훈 씨의 믿음은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인식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인식론적 증거주의에 대한 도전
도덕적 의무와 인식론적 의무를 구별함으로써, 증거주의는 투표자의 사례가 야기하는 딜레마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증거주의가 극복해야 할 진짜 난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인식론적 증거주의에 제기된 반론 가운데 하나는, "충분한 증거"를 인식론적 정당화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다른 하나의 반론은 보다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반론에 따르면, 증거주의가 타당한지 다른 형태의 믿음의 윤리학이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믿음의 윤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인식론적 증거주의에 제기된 이 도전이 과연 무엇인지, 믿음의 윤리학을 둘러싼 이 논의가 우리의 삶과 일상적 믿음 형성 행위에 어떤 함의을 갖는지, 다음 주에 발송될 2편을 통해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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