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절"이 왔습니다.
주말을 기점으로 부쩍 날이 더워졌습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게 느껴집니다. 봄은 언제 왔다 갔는지, 벚꽃은 언제 피었다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에 여름을 싫어하는지라, 빼꼼 들렀다 가버린 봄이 더욱 야속하기만 합니다.
여름이 정말 싫지만, 여름에 좋은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여름은 납량특집과 무서운 이야기의 계절입니다. 방송국 <심야괴담회> 같은 프로그램을 줄줄이 편성하고, 친구들끼리 모여 술 한 잔 하다가도 어김없이 "무서운 이야기 하자"는 제안이 튀어나옵니다. 몇 명은 싫다면서 울상을 짓지만 이들의 의견은 대체로 무시되고, 과하게 신난 몇 명이 불을 다 끄고 귀신 썰을 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렇게 삼삼오오 모여 무서운 이야기 하는 걸 참 좋아합니다. 무서운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다들 겁에 질려 말없이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그 분위기가 뭔가 귀엽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 몇 편이 오고가면, 누군가가 "괜찮아. 세상에 귀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이 틀림없이 옵니다. 겁에 질린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 혹은 겁에 질린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별 의도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그 발언은 의도와 무관하게 가열찬 논쟁의 기폭제가 됩니다. 한 쪽은 "과학이 이렇게 발달한 세상에 귀신 같은 게 어디 있냐"고 따지기 시작하고, 다른 쪽은 "그럼 귀신 봤다는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냐"고 받아칩니다. 무해한 괴담회로 출발했던 것이 그때부터 대환장 토론회로 둔갑하게 되는 겁니다.
귀신의 존재 여부로 시작된 논쟁은 귀신의 본성이 무엇인가, 인간이 귀신의 존재를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로 가지를 뻗어나갑니다. 그 와중에 엑토플라즘이니 전자기장이니 하는 온갖 유사과학이 튀어나오기도 하지요. 행여나 민감한 종교 논쟁으로 번지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논쟁의 참가자들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만, 사실 이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주제들은 모두 철학적 문제들이거나 최소한 철학의 문제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논쟁의 범위 또한 광활해서, 형이상학, 심리철학, 인식론, 과학철학, 종교철학까지, 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모두 포괄합니다. 그야말로 심야철학괴담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은 "14세 전후로 스스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곤 하는데, 귀신 이야기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화제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의 지적 본능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철학 방화범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웃고 있는 사람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고 철학은 더 좋아하는 저뿐입니다.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과 귀신의 존재론
여름의 도래를 맞이하여, 루드윅의 이번 레터의 주제도 '귀신의 존재론'입니다. 귀신이 철학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궁금하실 텐데요,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도록 하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몸과 함께 마음(mind)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리로 걷고,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고, 척추기립근과 광배근으로 데드리프트를 하듯이, 마음으로는 지각(perceive)하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계산하는 등 여러 심적 활동을 수행합니다. 한편, 심적 활동은 육체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저 음식 맛있겠다'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되고, '저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손을 움직여 포크와 나이프를 집게 하죠. 이처럼 마음은 몸에, 몸은 마음에 서로서로 사이좋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이처럼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에 매우 익숙합니다. "인간은 몸과 함께 신체를 가지고 있다"거나 "몸과 신체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지만, "인간은 몸과 함께 마음을 가지고 있다"거나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서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지요. 이처럼 우리는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별개의 실체라는 생각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마음은 몸과 다른 특성들을 여럿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고개를 숙여 아래를 한 번 내려다 보세요. 무엇이 보이시나요? 구독자님의 뱃살과 발가락이 보일 것입니다(발가락이 보이지 않는다면, 큰일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구독자님의 몸을 풀샷으로 감상하실 수도 있겠지요. 내시경을 이용하면 구독자님의 뱃살 아래에 숨겨진 장기까지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다릅니다. 마음은 그 어떤 장비를 사용하더라도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몸을 안팎으로 샅샅이 들여다보더라도 도무지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이렇게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마음이 육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별개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육체가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실체, 즉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혹은 물질적인(physical or material) 실체라면, 마음은 그와 근본적인 면에서 다른 비물리적, 비물질적 실체, 이를테면 "영혼"이라는 거죠. "영혼"이라는 단어에는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육체와 구별되는 별개의 비물리적 실체라는 생각 자체는 사실 굉장히 직관적일 뿐더러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런 생각의 흔적들을 대중문화나 일상 언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철학자들은 이원론(dualism), 보다 정확하게는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는 존재하는 것들("실체")을 물질적인 실체와 마음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실체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이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실체" "이원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이지요. 앞서 본 것처럼 실체이원론은 오늘날까지도 높은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이론임과 동시에, 마음의 본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이론이기도 합니다. (참, 마음의 본성이나 마음과 몸의 관계 따위를 탐구하는 철학의 분야를 심리철학이라고 부른답니다.)
실체이원론에 따르면 마음은 육체와는 달리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물리학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도 않으며, 모든 심적 활동을 관장합니다. 느끼고, 기억하고, 생각하는 심적 활동은 모두 육체가 아니라 마음, 정신 혹은 영혼이 수행합니다.
마음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귀신의 존재론과는 무슨 상관일까요?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약간 비틀어 "귀신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면 그 연관성이 뚜렷하게 보일 겁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귀신"을 "구천을 떠도는 죽은 사람의 영혼"쯤으로 정의합니다. 영혼은 원래 사람의 육신에 깃들어 있는 것인데, 이 영혼이 잠깐 외출하면 유체이탈이요,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으면 귀신이 된다는 거지요.
"귀신"에 대한 이런 통상적인 이해는 사실상 실체이원론을 그 근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귀신을 몸이나 사물과 같은 물리적 실체와 구별되는 정신적, 영적, 신적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실체이원론은 참인가? 즉, 영혼과 같은 비물리적인 실체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 심리철학의 문제를 탐구함으로써 귀신의 존재론, 즉 "귀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도 답할 수 있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해 보도록 하지요. 과연 귀신은 존재할까요? 철학이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마음과 몸의 비동일성 논변
실체이원론에 따르면 비물리적이고 비물질적인 실체가 있고(앞으로는 두 표현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또한 물질적인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인 실체입니다. 각종 종교나 민속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혼론, 즉 마음은 영혼이고 심적 활동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믿음도 실체이원론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지요. 통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므로, 일단 실체이원론이 참이어야만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체이원론은 타당한 이론일까요? 실체이원론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유력한 논변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의 강력한 논변은 우리가 앞서 마음의 특징을 논할 때 이미 살펴본 사실을 주된 논거로 삼습니다. 바로 마음이 몸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 논변을 마음과 몸의 비동일성 논변이라고 부릅시다.
몸은 그 구석구석을 볼 수 있지만 마음은 코뺴기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몸은 만질 수 있지만 마음은 결코 만질 수 없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실체들 중에서도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산소를 직접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산소가 다른 여러 방법으로 관측 가능한 것과 달리 마음은 그렇게 관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몸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너무나 다르고, 몸을 비롯하여 물질적인 실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을 마음은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몸과 구별되는 별개의 비물질적 실체로 이해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실체이원론이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동일성 논변의 주장입니다.
비동일성 논변은 다음과 같이 논증 형식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거짓의 군주 벨리알과 코기토 논변
우리는 비동일성 논변에 약간의 디테일을 첨가하여 한층 더 강력한 실체이원론 지지 논변을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비동일성 논변에 약간의 인식론을 곁들이면 됩니다. 이 주장을 멋들어진 라틴어로 코기토 논변(cogito argument)이라고 부릅시다. 다음의 사고실험을 통해 코기토 논변을 살펴봅시다.
코기토 논변의 핵심 아이디어는 비동일성 논변과 같습니다. 마음과 몸이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서 다르므로, 마음과 몸은 동일한 하나의 실체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비동일성 논변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마음의 특성에 주목한다면, 코기토 논변은 심적 활동을 하는 주체의 의심 불가능성을 지적합니다. 위의 사고실험에 따르면, 우리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지만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귀신 이야기나 공포 스릴러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도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귀신'입니다. "그 영화", 다들 아시잖아요.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귀신은 내내 자신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돌아다닙니다. 반전 엔딩을 연출하기 위해, 주인공이 사실 이미 죽은 귀신이라는 설정은 주인공은 물론 관객들에게도 마지막까지 철저히 숨겨집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서스펜스가 최고조에 달할 때, 비로소 주인공은 '혹시 내가 이미 죽은 귀신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런데, 귀신은 정의상 물리적인 육신이 없으므로, 주인공이 '혹시 내가 이미 죽은 귀신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몸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혀 비논리적이거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며, 이는 우리가 물리적인 몸의 존재 여부를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음과 몸의 이 차이, 즉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지 여부의 차이를 근거로 실체이원론을 옹호하는 코기토 논변을 다음과 같이 논증 형식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뭘까요? 그야 물론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실체이겠지요. 이를테면 영혼이요!
잠정 결론: 귀신은 존재할까?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고, 영혼이란 물리적인 육체와 구분되는 비물리적인 실체라면, 귀신의 존재 여부는 결국 실체이원론의 타당성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체이원론이 부당하다면, 즉 비물리적인 영혼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귀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상당 부분 근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변들은 실체이원론의 타당성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그러나 논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다음 레터에서는 실체이원론에 대해 제기된 몇몇 반박 논변들을 살펴본 뒤, 실체이원론을 둘러싼 찬반 논변들을 저울질하여 양쪽의 타당성을 가려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심리철학의 영혼 논쟁이 우리의 주제인 귀신의 존재론에 관해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도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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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용어로 재단한 모범생 같은 질문 말고, 날 것 그대로의 철학적 궁금증을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령,
가 아니라,
와 같은 질문을 선호합니다. '이런 게 철학적 궁금증 맞나?' 하는 의문은 가지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철학이 다루지 않는 문제란 없으니까요. (설령 과학이나 다른 학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더라도 제가 철학적 관점에서 질문을 재해석하면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철학적 궁금증을 루드윅을 받아보시는 이메일 주소와 함께 공개 또는 비공개 댓글로 적어주세요.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
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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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0
어른이들이 포켓폰 띠부띠부씰에 왜 열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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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
'러셀선생님' 하니까 생각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 마지막 명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 해야한다" 뭔가 멋잇어보이는 말이는데 무슨뜻인지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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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
있어보인다는 이유로 철학을 좋아해도 될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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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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됴응
+ 타인과의 생각의 차이를 어디까지 인정해야하나요? 다른 사람이랑 생각이 다를 때 "아 너는 그렇구나"라고 생각해야하는 범위를 알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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