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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읽기 어려운 책이라면 눈부터 감아버리는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지만, 언젠가 읽고 또 읽었던 어려운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아마 한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고 엮어 만든 짧은 책이었다 그러니까, 그 책은 자기가 책인지도 모르고 책이 된 것이다 들려주기나 할 줄 알았지 보여주기는 생판 한 적이 없으니 이 글자들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며, 자음과 모음 전문용어들 심지어 한숨과 쩝 에 음 소리 하나하나마다 발음되기만 기다렸다가, 교수 타계하고 나서는 도서관 책장에 박혀 아무도 불러주질 않았으니, 얼마나 서운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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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그 책 얘긴데, 어려워서 어쩔 줄 몰랐지만 어쨌든 친구녀석들에게 어려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책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노트에 써가며 책을 읽었다 아니 읽는 척을 한 거다 이 읽는 척은 대단히 효과적이었고 어느새 나는 독서광, 책벌레, 철학자 하여간 불명예스러운 칭호란 칭호는 다 얻어 오늘은 어떤 부분을 읽을 아니 읽는 척을 해보실까 입맛을 다실 참이면, 어김없이 글자들 튀어나와 눈물 대신 흐르려 하고 이제는 없는 교수의 한숨소리도 내 입가에서 알뜰하게 재현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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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것도 있었나 싶은 어려운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불어올 때 이게 어디서 알게 된 거였지, 하다보면 동네 도서관 팔백몇번대 책장으로 순식간에 날아간다 애써 감췄던 어려움이 아직도 잔뜩 묻어있는 마음은 늘 그 자리에서 벗어난 적 한 번 없으니… 우리는 이렇게 언제나 예상치 못한 재회를 한다 독서가 나를 찾지 않더라도 이렇게 그를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한껏 황당하고 야멸차진 요즘, 학창시절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가 어색한 미소 또는 경멸로 만나듯, 나는 이렇게 그 책을 기억한 채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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