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음식점 이름은 직관적이어야 한다. [마녀주방]이라던가 [갓잇]이라던가, 손가락을 움직여봐야 무슨 음식을 파는 곳인지 눈치챌 수 있는 이름으로는 도통 군침이 돌기 어렵다. [수색 유린기]. 얼마나 털털한가. 어떠한 설명도 입만 아파지는 이름. 이 애정하는 두 단어의 조합에 어찌 저항할 수 있으랴. 이곳 대머리 주방장의 요리 실력을 극찬하기에 앞서, 유린기 앞에 당당히 붙어있는 수색에 대한 소개로 맛집 기행을 떠나보자.
“봄날은 간다”의 처음 배경인 수색역은 빨간 벽돌에 청록색 지붕이 아름다웠다- 고 전해진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철거되어, 지금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지만, 지금 역의 화장실이 넓고 쾌적해졌으니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색은 구 수색역을 논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매력이 넘친다. “디지털미디어시티” 라는 겉멋 가득한 친구와 함께 다니는, 수수하지만 내공 있는 친구랄까? 가다가 지나치는 [형제대장간]은 또 어떻고! 대장장이 형제가 60년 간 화덕에서 쇠를 달구어 두들기는 곳이라니,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뛴다. 아니, 줄줄이 널려있는 곡괭이들이 무서워서 그럴까. 곡괭이에 놀란 가슴 [원조우동짜장집] 간판으로 눈이 돌아간다. 허름 그 자체. 우동과 짜장에 흔들리는 마음 다잡고자, 발걸음을 서두른다.
유린기와 깐풍기, 칠리새우를 팔지만, 짜장면과 짬뽕 따위 상대하지 않는 곳. 낮에는 한식뷔페, 밤에는 생맥주를 파는 수상한 가게. 흰자위로 흘겨본 다른 테이블은 모두 깐풍기에 생맥주다. 얼른 따라 시켜본다. 떡볶이와 함께! 촉촉 파삭한 닭튀김의 겉껍질에 스며든 달달 짭조름한 소스, 아래 깔린 양배추는 아삭아삭, 위는 청양고추로 매콤하게, 바보다 바보. 안 오는 사람 바보. 냉면 그릇에 주는 떡볶이는 프랜차이즈의 따귀를 때린다. 수색 떡볶이로 이름을 바꿔도 괜찮겠다.
이곳을 더 맛집으로 만드는 건 바로 냄새다. 수색역에서 폴폴 풍겨오던 사람 냄새. 지하철에서 사람에게 치이며 웅크리던 승모근도 여기선 차마 버티다 못해 내려오고 만다. 팔씨름 대회에서 1등한 대머리 주방장과 홀서빙을 전담하는 그의 아내,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인 남자아이. 가장 모퉁이 테이블에서 아이는 아빠가 튀겨 준 치킨을 먹더니, 책가방에서 수학책을 꺼내 문제를 푼다. 엄마는 아이가 어려워하는 수학 문제를 가르쳐주다 손님의 맥주 추가 주문도 놓치고 만다. 아, 이 얼마나 편안한 불편함인가. 술이 아닌 분위기에 취한 손님들도 한껏 여유롭다. 술이야 조금 늦게 가져다주면 어때, 그 시간은 오히려 맛있는 음식과 귀여운 아이 칭찬으로 채워진다.
첫 방문임에도 내 기억 저어기 너머 향수를 끄집어내는 곳. 멋드러진 롯데캐슬 아파트를 앞에 두고도 기죽지 않는, 세 식구를 유린기로 먹여 살리는 삶이 있는 곳. 대머리 주방장의 친구들은 마감 시간을 앞두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에는 고량주 8병이 들어 있고, 아이 옆에 앉아, 주방장의 퇴근을 기다린다. 그리고 하나 둘 삶의 고단함을 꺼내놓겠지. 한시라도 가게 주인이 퇴근하길 바라며,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본다. 기분이 좋다. 퇴근길에 항상 빵을 사오던 아빠가, 오늘은 뭘 사올지 기다리던 내가 아직 저 기억 너머에 있구나? 그래, 오늘 유린기는 내가 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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