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만드는 작업이 막바지에 달했을 즈음, 최고신이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최고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인간의 모습이 처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신들의 형상을 본뜨긴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투박한 느낌도 있었다. 날개도 없었고, 볼품없이 조그마했다. 신기한 듯 둘러보는 부하들에게 최고신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인간을 내려 보내면 작업이 끝나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마지막 단계를 위해서요. 수명을 짧게 정해둔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영원한 삶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던 신들로서는 떠올리지 못한 부분이었다. 잠시 숙연해진 찰나, 사랑의 신이 나섰다.
“그림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도록 함이 어떻습니까? 가끔은 특출난 재주를 지닌 인간을 빚어주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반응이었다.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에서, 최고신이 반문했다.
“허나 인간들 중에는 눈빛을 잃는 이도 생겨날 것이다. 이들을 구제할 수단이 있는가?”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중에, 앞으로 나온 자는 쾌락의 신이었다.
“소리를 내면 감정이 전달되도록 만들어 보십시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부분이 수긍했다. 박수를 치는 신도 있었다. 하지만 최고신은 여전히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소리를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적지 않은가? 여럿이 모여야 할 때에는 어찌할 셈인가?”
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신들은 그들보다 훨씬 개체수가 많은 인간의 상황을 두루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희들처럼 기억을 하도록 만드십시오.”
누군가가 불쑥 던진 말이었다. 침묵을 깨뜨릴 자격이 있을 만큼 강단 섞인 목소리였다. 그 기세가 전해져서일까. 잠시 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신들의 아우성이 쏟아졌다.
“절대 아니 될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생명에게도 기억을 하는 능력만큼은 불가합니다!”
“당연합니다! 기억이란 천상계만의 도구입니다. 인간이 기억을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도전해 올 것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분위기를 잠재운 최고신이 그에게 물었다.
“인간을 그리 뛰어난 생명체로 만들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인간의 지식이 수백 년 정도로 쌓일 때마다 우두머리를 바꿔 보십시오. 새로운 우두머리에게 유리한 내용만 남기기 위해 제 손으로 기억을 지워버릴 겁니다.”
이는 최고신조차 짐작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신의 도구를 주더라도, 그들끼리의 다툼을 일으키면 신을 넘볼 수 없다니. 말문이 막힌 신들 사이로 곰곰이 생각하던 최고신이 재차 물었다.
“허나 끊임없이 다투고 헐뜯다 보면 인간들의 세상은 얼마 가지 못해 멸망하고 말 것이 아닌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난점이었다. 다른 신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하지만 거기까지도 생각해 둔 듯, 모성의 여신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인간의 첫 기억만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마침내 결정은 내려졌다. 인간은 그림과 소리로 사랑과 쾌락을 남기며, 때론 서로 다투느라 기억을 더럽히지만, 어머니의 기억으로 이를 치유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염왕
심오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에요!
의견을 남겨주세요
라킴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