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만난사이_24년상반기

할머니를 찾습니다

<인생 첫 기억>에 대하여, 수요지기 S가 쓰다

2024.03.13 | 조회 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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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12월 27일 18시 30분경, "월드컵파크 9, 10, 11, 12단지 정류장"에서 7726번 버스에 승차하신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를 찾습니다.

 제가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저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유일한 버스인 7726번에서였지요. 당시 저는 20분 배차간격의 버스에 압도당하여, 울분을 토하고 때로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마냥 신도시의 당연한 권리를 찾겠다며, 구청과 시청에 버스를 늘리고 배차간격을 줄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었지요. 그러던 중 마주한 분이셨어요. 할머니는 으레 어르신들이 그러하듯 버스에 올라타시자마자 본인의 사연을 라디오처럼 읊어주셨죠.

 50년 전 덕은동으로 시집오시고, 20년 전 생긴 7726번 버스가 지나는 정류장 바로 앞에 거주하시는 할머니. 딸의 손을 잡고 모래내 시장에 가서 떡볶이도 함께 먹고, 함께 교복을 맞추러 나갔던 분. 하나 있는 딸아이가 대학교를 가고부턴, 친구들과의 마실을 가기 위해 이 버스를 타셨고, 사위를 처음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는 애써 다림질한 옷에 주름이 가진 않을까 빈 자리도 외면하며 서서 가셨던 할머니.

 신도시가 지어진 22년 11월, 그 모든 추억들이, 하루아침에 할머니 댁이 있는 우측 갈림길이 아닌 좌측으로 갔을 때, 할머니는 슬프다 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속상하다는 말로 다 하셨지요. 그리고 이제는 그마저도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이사를 왔으니 그런 것이라며 더 이상 서운해하지 않다면서 하차하신 그 할머니를 찾습니다.

 네, 제가 이렇게 할머니를 찾아 헤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다시 마주한다 해도, 일방적인 사과는 오히려 상대방을 당황하게 할 뿐. 용서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상대에겐 부담이 되지요. 그래서 저는 삶의 고단함으로 뒤덮인 “인생의 첫 기억 모음집”에 할머니의 기억 찾아 꺼내어 여러분 앞에 보여드릴 뿐입니다. 상상력과 끈기가 부족한 저는, 깨달음을 얻은 모든 첫 기억을 꼬깃꼬깃 모아두곤 합니다. 일상의 익숙함이 우리를 녹슬게 할 때 이렇게 첫 기억을 찾아보는 것만큼 사람을 말랑하게 만드는 무언가란 또 없지요.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 오늘도 저는 7726번 버스에서 할머니를 만나지 않을까 한껏 두리번거려 봅니다. 그리고 내뱉지도 못할 말을 꿀꺽 삼킵니다.

 ‘할머니, 못난 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수요지기 S의 Talk

이 뉴스레터가 발송될 때, 저는 6호선 신내행 지하철에 몸을 싣고 대흥역을 지나치는 중이겠네요. 실리카겔의 "Eres Tu"를 들으면서요.

"첫" 뉴스레터의 기억으로 남을 이 순간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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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염왕의 프로필 이미지

    수염왕

    0
    약 2년 전

    잘읽었어여^-^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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