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50대 남성이 배우자와 이혼한 뒤 11년 간 자녀 2명에 대한 양육비 1억4천여만원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형사고소를 당했습니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된 이후 처음으로 형사고소를 당한 ‘1호 사건’이었어요. 이 남성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1억원이 넘는 양육비를 아이들의 엄마에게 한 번에 송금했고, 늦게나마 양육비를 지급했다는 점을 참작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어요. 경제적 여력이 있는데도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들에게 ‘실형 가능성’으로 양육비 지급을 강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였죠.
양육비 안 주는 건 아동학대 아닐까요?
이 사례를 접했을 때 저는 ‘제도의 순기능이 발휘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언론을 통해 전해진 피해자의 입장을 접하고나서 ‘제도의 순기능이 발휘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피해자가 15번에 이르는 각종 소송을 제기하면서 일상을 전부 포기하고 ‘미쳐 있는’ 상태로 살아온 세월 동안 4,5살이던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해요. 아이들의 어머니는 “양육비는 받았지만 우리의 상처는, 이미 이루어진 학대는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지급된 양육비는 단순히 ‘못 받은 돈’에 불과한 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조건인 만큼, 아동인권의 관점에서 양육비 문제를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육비 안 주면 형사처벌? 절대 쉽지 않다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한 양육자는 먼저 가정법원에 양육비를 청구하는 가사소송을 진행할 수 있어요. 소송을 걸면 법원에서 양육비 미지급 부모에게 지급명령이나 이행명령을 내려줄 수 있고요. 이행명령을 받고도 양육비를 제대로 주지 않으면 가정법원에서 감치명령을 받을 수 있는데요, 감치명령을 받으면 양육비 미지급 부모가 경찰서 유치장 등에 20일 이하의 구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감치처분 후 1년 이내에 의무 이행을 하지 않으면 출국금지 등의 제재와 형사고소를 당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하면 운전면허 정지와 같은 각종 제재가 생겨나면서 양육비 지급 강제력이 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양육비 전문가들은 여전히 ‘나쁜 부모가 악의를 품으면 얼마든지 양육비 지급을 회피할 수 있는 구조’라고 말해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감치명령
일단 강제력을 발휘할 첫 단계라고 볼 수 있는 법원의 ‘감치명령’을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요. 감치명령은 신체를 구속하는 집행력을 갖고 있어서, 당사자가 직접 법원의 문서를 전달받고 감치재판을 인지한 상태여야 법원이 감치처분을 결정해준다고 합니다. 즉, 위장전입으로 거주지를 숨겨서 법원의 문서를 전달받지 않으면 감치명령을 피할 수 있는 거예요. 실제 양육비 미지급자 중에는 위장전입이나 해외도피 등으로 실거주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양육비해결총연합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양육비 미지급자 중 단 27.6%만이 실거주지가 분명한 상태였다고 해요.
감치명령 받아내면 뭐하나, 집행률은 10%대에 그쳐
어렵게 법원에서 감치명령을 받아내더라도 양육비 미지급 부모가 구금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또 있습니다. 감치명령이 내려진 뒤 6개월 동안 감치 집행을 피하면 기간 만료로 명령이 해제되거든요. 경찰과 주민센터 공무원에게는 양육비 채무자를 추적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등본상 주소지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려보는 게 6개월 간 반복되고 나면 양육비 채무자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어버린대요. 감치명령을 받아내도 당사자가 몇 달 잠적해버리면 무용지물이 되는 거죠. 법원의 감치명령이 실제 집행된 비율이 10%대에 그치는 이유입니다.
강력한 제재 만들어도 활용하기 어렵다면 무용지물
운전면허 정지, 신상공개, 형사고소 등 양육비 미지급자에게 실제적으로 압박이 될 수 있는 제재들은 모두 감치명령을 받은지 1년이 지나야 가능해요. 그런데 감치명령을 받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도입해놓은 다양한 제재가 효과적으로 쓰일 수 없다는 얘기죠. 면허정지나 출국금지의 기한이 만료되면 또다시 지난한 감치명령의 절차를 밟아야 하고요. 이런 문제 때문에 감치명령과 별개로 각종 제재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안이 발의되었으나, 아직 의회에 계류 중입니다.
.
법적 분쟁 거치는 동안에도 아이는 자라야 한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에게 제재를 가하기까지 복잡하고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야하는 문제는 아동의 인권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해요. 법적 분쟁을 겪는 수년 동안 아이는 계속 살아야 하고, 또 자라야 하잖아요. 부모 중 한 명이 양육비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가 오랜 기간 법적 분쟁에 매달려야 하므로 아이는 이중고를 겪게 돼요.
국가가 양육비 대신 지급하고 받아내면 안 되나
양육비를 받아내기 위한 고된 법적 절차 속에 성장기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국가가 먼저 양육비를 지급한 뒤 나중에 양육비 미이행 부모에게 징수한다면 어떨까요? 독일,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국가들은 ‘양육비 대지급 제도’를 운영하고 있거든요. 소송을 거치지 않고도 행정청에 신청을 하면 양육비가 제때 지급되지 않거나, 기준 금액보다 적게 지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양육비가 지급돼요. 동시에 양육비를 주지 않은 부모로부터 양육비를 받아내야 할 채권자도 국가가 되죠. 국가기관이 채무자의 재산 및 소득을 조회하고, 상환이 이뤄지지 않을 시 강제집행을 통해 양육비를 회수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도 양육비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부모 가정에 최대 1년 간 긴급 생활비 월20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를 시행 중이지만,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하는 일부 가정에게만 지원되고 있어요.
채무자 강력 제재로 ‘양육비는 의무’ 기조 세워야
지금껏 선거철이 되면 양육비 대지급 제도에 대한 공약이 등장하곤 했었는데요, 비용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 않고 있어요. 일단 국가가 양육비를 선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큰 규모의 예산이 편성돼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고 해요. 무책임한 부모를 대신해서 세금으로 양육비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비용 문제는 채무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동원해 회수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공권력을 가진 국가의 전문적이고 신속한 추심을 통해 ‘양육비는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것’이라는 기조를 만들어가야 무책임한 부모가 많아지는 걸 막을 수 있잖아요.
부모의 ‘무책임’ 그냥 둔다면 무책임한 국가
독일의 경우 한부모 가정이 크게 증가한 현상이 양육비 대지급 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해요. 우리나라도 부모 한쪽이 양육비를 ‘나 몰라라’ 하는 가정을 국가마저 책임지지 않으면 무책임 속에 방치되는 빈곤 아동이 굉장히 많아질 수 있어요. 아동빈곤을 적시에 예방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양육비 대지급 예산은 국가가 ‘꼭 써야하는 돈’이 아닐까요?
[참고 문헌]
여성가족부. 2021. <2021년 한부모가족 실태조사>.
허민숙. 2023. <양육비 대지급제 해외 운영 사례: 아동빈곤 해소와 양육비 이행 강화의 두 가지 기대효과>. 국회입법조사처.
허민숙.2022. <「양육비이행법」의 입법영향분석>. 국회입법조사처.
한국건강가정진흥원. 2023. <2923년 한시적 양육비 긴급지원 신청 안내>.
매일경제. 23-06-22. <“양육비 왜 안줘”…나쁜 아빠 엄마가 안주면 대신 준다는 이 나라>.
충남일보. 23-05-29. <한부모 미지급 양육비, 소송해도 받기 힘겹다 왜?>.
여성신문. 23-06-08. <3억 외제차 타는 인권 변호사, 자녀 양육비 안 주고 잠적… “위장전입은 전통”>.
조선비즈. 23-05-10. <[단독] 13년간 양육비 안 준 ‘나쁜 아빠’, 형사처벌 대상되자 전액 지급>.
KBS뉴스. 23-06-01. <“13년 밀린 양육비”…‘배드파더’ 첫 수사 결론은 기소유예>.
경인일보. 23-06-01. <재판도 못 간 '나쁜아빠 1호 형사고소'… 피해자 공분>.
아주경제. 22-01-10. <[단독] 양육비 미지급자 72%는 실거주지 불분명..첫 통계>
YTN. 23-02-14. <[뉴스라이더] 출국금지하니 양육비 1억 '툭'...이사 간 척 모르쇠 다반사>.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