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8일 토요일, 대전의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인도로 돌진해 9살 배승아 양이 사망했습니다. 함께 사고를 당한 다른 초등학생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이며, 다른 피해 어린이들도 실어증 등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음주운전이지만, 스쿨존을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뒀다면 참변을 막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통학로에 안전펜스를 설치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있었거든요. 가해자 처벌 강화나 주행 속도를 제한하는 규제도 중요하지만, 속수무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최소한 생명은 지킬 수 있으려면 방호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였어요.
2019년 충남 아산의 한 스쿨존에서 김민식 어린이가 사망한 이후 생겼던 ‘민식이법’에 안전 펜스에 관한 내용이 들어갔지만, 권고에 그쳤습니다. 안전펜스를 설치하는 데에는 1m당 27만원 가량이 든다고 해요. 설치비용이 높은 안전펜스가 알아서 마련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 때문에 안전펜스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의견도 나오는데요, 안전펜스가 모든 스쿨존에 통하는 대책은 아니라고 합니다. 도로 특성에 따라서 울타리가 아이들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대요. 결국 지역마다 학교 주변 환경과 아이들의 동선을 고려해서 안전대책을 만들어야 하는 건데요, 문제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자꾸 부딪힌다는 점이에요.
주민 반대로 바꾸지 못한 통학로, 그곳에서 결국 동원이가 죽었다
지난해 12월에는 서울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만취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하교하던 이동원 군이 사망했습니다. 사고가 난 도로는 오랫동안 학부모들이 관계기관에 개선을 요청했던 곳이었어요. 2019년에는 서울시교육청이 나서 안전에 문제가 있다며 구청과 경찰에 개선안을 전달했지만, 여론조사에 참여한 주민 50명 중 48명이 개선안에 반대해 실현되지 못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결국 동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해당도로에 인도가 마련되고 울타리가 설치됐어요. 지금 그 도로의 이름은 ‘동원로’로 바뀌었죠.
안전한 '동원로'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해당 도로의 폭이 좁아 보도를 따로 만들게 되면 일방통행로로 바꿔야 했거든요. 먹자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평소 통행량도 많아 주민들의 불편이 예상된다는 반대 목소리가 나왔어요. 강남구청 측은 "학교와 경찰,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해 결정한 사항이고, 차량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일방통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행자 안전을 위해서 일방통행을 하는 것"이라며 청담동 주민들을 설득했어요.
어린이 안전망이 없는 이유? ‘불편한 어른들의 민원’ 때문
학교 주변 도로를 안전하게 바꾸려고 할 때 주민 반대에 부딪히는 건 흔한 일입니다. 대전에서 배승아 양이 사망한 도로 앞쪽에는 원래 과속방지턱 5개가 설치됐었는데요, 교통 불편을 초래한다는 민원이 100여건 접수되면서 일주일만에 철거됐대요. 서울 시내의 한 초등학교 스쿨존의 경우 학부모들의 서명을 받아 3년 만에 어렵게 과속방지턱을 만들었는데, 방지턱 때문에 시끄럽다는 민원으로 몇 개월만에 방지턱 높이를 깎아 평평하게 변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스쿨존 속도 완화가 ‘국민안전’ 정책이라는 정부
‘어린이의 안전’보다 ‘어른의 편의’를 더 중시하는 건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대전의 스쿨존에서 배승아 양이 숨진 다음날, 대통령실은 어린이 보호구역의 속도제한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놀랍게도 ‘국민 안전’을 위한 정책화 과제로 선정되어 있었는데요, 어린이는 국민이 아니었던 걸까요?
현재 스쿨존은 30km로 속도가 제한되는데요, 정부는 어린이가 통행하지 않는 시간대에 좀 더 높은 속도로 달릴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고 합니다. 오후 8시 이후부터 다음날 오전 8시 전까지는 속도제한을 50km로 완화하자는 게 대표적인 의견이에요. 대전, 광주 등 일부 지역에서 이미 시범사업으로 시간대별 탄력적 속도제한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심야시간대에도 어린이 교통사고 위험 존재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최근 5년간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 사이 어린이 교통사고 발생 건수가 전체 시간대의 4.7%에 불과했고, 사망자는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시사IN 보도에 의하면 2017년 부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오후 9시경 신호를 위반한 승용차에 치여 6세 아동이 사망했고, 2021년 경주에서는 오전 7시 50분 등교하던 초등 5학년 어린이가 신호를 위반한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습니다.
야간에 발생하는 보행자 교통사고의 심각도가 주간보다 1.2배 이상 높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발생 건수가 적다는 이유로 야간에 속도 제한을 풀면 어린이는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요새는 맞벌이 등의 사정으로 학원이나 돌봄교실에 있던 어린이가 저녁 8시 이후에 귀가하는 경우도 있고요.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속도가 5% 감소할 때 사망사고는 20%, 부상 사고는 10% 감소했다고 해요.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실험한 결과 30km로 달리던 차량이 보행자와 충돌했을 때 중상가능성이 15%인데 50km달렸을 땐 72%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고요. 성인의 인체모형으로 진행한 실험이니 아동의 경우에는 피해가 더 치명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부는 2026년까지 어린이 보호구역 내 사망자를 제로(0)화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요, 야간에 스쿨존을 지나는 소수의 어린이를 보호하지 않으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겁니다.
몇분 빨리 가려다 어린이가 죽는다
우리 아이들을 교통사고로부터 안전하게 만드는 데에는 비용이 듭니다. 그 비용에는 어른들의 불편도 포함되겠죠. 불편을 줄이기 위해서 규제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린이의 안전을 타협 대상으로 삼아 어른들이 편의를 얻어내는 쪽으로 제도가 바뀌어선 안 됩니다.
경찰청 등에서 제한속도 60km로 주행하던 차량을 50km로 낮춰 달리는 실험을 해봤더니, 운전자가 손해를 보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2분이었다고 해요(평균 구간길이 13.4km). 운전자들이 출발지에서 몇분만 더 일찍 나오거나 몇분만 천천히 도착하는 작은 불편을 감수하는 것으로 어린이들을 살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어린이의 목숨을 담보로 규제를 완화해도 어른들이 얻는 편익은 고작 몇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전반적으로 한국은 아동을 혐오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2019년, UN의 아동권리위원회의 한 위원이 한국에 남긴 말입니다. 아이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어른들의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참 크게 들리는 우리나라를 보면 정확한 지적을 한 것 같아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해외 여러나라에서는 도로의 폭을 일부러 좁히거나, 길을 지그재그로 만드는 등 자동차가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어린이를 보호한대요. 어린이에게 더 안전한 스쿨존을 만들려면 지금보다 운전자는 더 불편해지고 경각심을 갖고 운전하게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스쿨존이 아니어도 어른들의 영역은 많으니까요, 어린이 보호구역 만큼은 어린이의 안전이 최우선인 공간으로 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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