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슬기

시와 노가리 ep.12 밥들의 감촉

김복희, <죽어서 먹는 밥>

2023.09.11 | 조회 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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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들의 감촉

 

밥을 짓는다. 밥 짓는 향이 주방 안에 물씬 풍긴다. 어렸을 적엔 하루에 한 번씩 꼭 맡았던 이 향이 이제는 퍽 생경하다. 아빠와 엄마, 동생. 네 식구가 한 집에 살던 시절의 아침은 꼭 밥 짓는 냄새로 시작했던 것 같다. 전기밥솥이 있음에도 엄마는 꼭 압력 밥솥으로 밥을 지어 우리를 먹였다. 저녁마다 빨간 쌀통에서 머그잔으로 세 컵. 흐르는 물에 쌀을 씻고, 외할머니가 계시던 시골에서 보내온 콩이나 현미 같은 잡곡들을 섞어서, 아침까지 불려둔다. 그렇게 새벽 내 곤하게 잠들어서 몸이 잔뜩 불어버린 쌀들은 어떤 날은 진밥이 되고, 또 어떤 날은 된밥이 되어 우리 가족의 한 끼 식사가 되어주었다. 나는 종종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밥이 참 달다.

가족들과 먹던 아침밥의 감촉은 참 달았던 것 같다. 달다. 사전적 의미로는 입맛이 당기도록 맛있다거나, 흡족하여 기분이 좋다거나, 마땅하다거나. 어린아이였던 나의 언어적 기지가 달다는 말의 감촉이 내포하는 수사를 정확히 설명했을 리 없다. 아마도 나는 말보다 밥을 먼저 배웠을 것이고, 밥을 설명하고 싶었을 것이며, 끝끝내 달다는 말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갗의 즉각적인 반응과 같은 표현. 그러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추상적이고 은유적일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엄마가 내 표현을 흐뭇해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떠올려봐도 대체할 다른 언어가 없다.

나는 압력밥솥으로 밥 짓는 방법을 엄마에게 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에게 배운 것은 밥을 짓는 물의 양뿐이었지만 그마저도 꽤나 상대적인 방식이었다. 쌀 위에 살포시 손을 얹고 손등까지 물이 차면 그대로 밥을 지으면 돼. 불의 세기라든가, 뜸을 들이는 시간이라든가. 다른 모든 것은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다. 엄마의 손이 닿은 쌀들은 된밥이나 진밥이 되었는데, 내가 지은 것들은 꼭 탄밥이나 설익은 밥이 되었다. 몇 번의 반복을 통해서 온전한 밥이 되기까지. 그렇게 혼자서 지어먹는 밥은 별로 달지 않다. 이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추상적이고 은유적일 수 없는 나의 언어적 기지 안에서 달다의 부정은 쓰다나 맛없다가 아닌 혼자다. 목으로 씹어 넘길 때, 이 감촉은 정확하고 매끈하다.

밥은 먹었어?

누군가 내게 묻는다. ‘밥 먹었어’와 ‘밥은 먹었어’란 말의 감촉을 너는 이해하고 있을까. 은는이가. 조사가 체언에 붙어서 은유와 여지를 만드는 기묘함을. 나는 그 기묘함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단 한 가지, 언젠가 내가 들었던 ‘밥은 먹었어’라는 말은 밥 그 자체와 다를게 없었다는 이야기 뿐. 따듯하고, 든든하고, 어느 때는 울컥거리는. 누군가 너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그는 너를 알아보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껏 먹어주기를. 언뜻 보면 말이라는 단어는 밥이라는 단어와 꽤나 닮은 구석이 있으니까.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에 꼭 죽는 날을 미리 점지받을 수 있다면, 요절하거나 급사하지 않고 수명이 다해서 죽은 나무처럼 평범하게 눈 감는 날을 알 수 있다면, 꼭 손수 밥을 지어먹고 싶다고. 구할 수 있다면 오래전 시골에서 얻어온 현미나 콩을 넣어 지은 밥이면 좋겠다. 그냥 지은 쌀밥은 너무 심심할 것 같으니까. 외할머니께서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 어떤 품종인지 어떻게 자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들여 꼭 찾을 것이다. 점지받은 날이 밥 지어먹기 풍성한 가을 즘이라면 좋겠다. 밥이 밥만을 의미하지 않으니 반찬도 필요하겠지. 그다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인삼보다 좋다는 가을무를 가늘게 채 썰고 버무려서 무채를 만들고, 국은 멸치 육수로 우려낸 된장찌개 정도가 적당하겠다. 호박과 팽이버섯을 넣고 자박하게 끓인. 생선도 한 마리 구워 먹을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뱃살이 통통한 고등어가 좋을 것 같다. 오랫동안 입안에 기름의 무늬가 머무는. 그리고 네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조금 슬픈 일이 분명하겠지만. 그 정도면 만족스러울까. 살아서 먹는 마지막 밥의 감촉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있잖아, 죽어서 먹는 밥의 감촉은 어떻니.

그 밥 달더라

살아서 먹는 밥은 그만 못하더라

흠향하는 것들 소리가 다 들렸다

꿈 없이 시름없이
그림자에 기대 느릿느릿 와서 남의 집 밥상머리를 차지해버리는 것

나는 절을 하다가…… 절을 두 번 하다가…… 그대로 잠든 것처럼
엎어졌다
술 없이 정신없이
진설한 음식 위로 늘어졌다

그림자는 못 잔 잠만큼 짙다 향내 나는 그늘이다
나는 이것을 몸으로 배웠다

잠 없이 반항 없이
나는 움직이지 않으리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 받아도
다시 살아나지 않으리

몸이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좋은 무대
어둠 속에 고스란하였다

어둠이 관람석에 자리를 잡았고
연극은 도중에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복희, <죽어서 먹는 밥>

 


° 김복희 『스미기에 좋지』 (봄날의 책, 2022)

첨부 이미지

김슬기 작가의 <시와 노가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잔 대신 시집을 듭니다. 술 대신 시를 나눕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시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첨부 이미지

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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