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나리

[강나리와 김해경] 아자아자, 넷

시원함도 더위처럼 옮는 거니까.

2024.06.12 | 조회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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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네 번째 빵꾸]_강나리

  믿으면 집착이 되고, 집착은 믿음이 된다. 믿어버리면 구원도, 절망도 눈을 뜬다. 덥석덥석 믿어버리는 그런 가운데, 적당의 품격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곳 저곳에 소비된 믿음은 정작 내 자신에게로 향하지 못한 채 물성과 해체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래도 오늘은, 땀나게 물성을 좇는 일을 한 시간 정도 덜어내어 모공팩도 하고 고소한 매생이굴국도 끓였더랬지.

  남자여, 살아남으려 악독해진 나를 용서하세요. 어떤 인격들을 추억하면서, 그것들을 흉내내기도 어려울만큼 너무나 먼 시간들을 보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에 머무를 여유조차 없어서, 잔상으로 나 홀로 파묻혀 돌아갔다. 잔상으로 홀로 돌아갔다. 미워한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나보다. 내 왼쪽 몸은 어느 새 그것들과 꼭 닮은 채 오른쪽 몸마저 잡아먹으려 소매를 걷고 있다. 이제 그만 미워해야지 ! 명상 가이드에서 그랬다. 아, 그랬구나. 거기에 있었구나. 이 마음가짐이면, 이 세상에는 불행한 일도, 가슴 터질 것처럼 억울한 일도 없다고. 터져나오는 가슴을 욱욱 욱여넣으며 되뇌어본다. 그랬구나. 있었구나.

  한여름 길목으로 접어드니 뜨끈한 피가 자주 돌아 몸이 가볍다. 벌레들은 창궐하기 시작하고, 스치는 살의 점도가 높아진다. 겨울의 낭만도 좋지만, 유독 피가 잘 돌지 않고 잘 붓고 무거워지는 나로서는 다소 덥더라도 여름은 축복의 계절이다. 앓던 겨울을 실컷 보상받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토록 쓸쓸한 여름, 무엇을 해야 하나. 갈 곳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데, 함께하고 싶은 이가 없어 혼자만의 계획을 꾸려야겠다. 바다와 계곡은 사람으로 사람과의 추억으로 포화상태니 숲으로 가야지. 아니야, 숲은 벌레가 많으니 그나마 도시에 머무르자. 아니야, 도시는 시끄러우니 한적한 동네로 갈까. 그래, 그냥 집에서 선풍기나 마주보고 있지 뭐. 남들의 피서를 구경해야지. 시원함도 더위처럼 옮는 거니까.

[옮아가는 것들]_김해경

  한여름 길목으로 접어드니 뜨끈한 피가 자주 돌아 몸이 가볍다. 벌레들은 창궐하기 시작하고, 스치는 살의 점도가 높아진다. 겨울의 낭만도 좋지만, 유독 피가 잘 돌지 않고 잘 붓고 무거워지는 나로서는 다소 덥더라도 여름은 축복의 계절이다. 앓던 겨울을 실컷 보상 받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토록 쓸쓸한 여름, 무엇을 해야 하나. 갈 곳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데, 함께하고 싶은 이가 없어 혼자만의 계획을 꾸려야겠다. 바다와 계곡은 사람으로, 사람과의 추억으로 포화 상태니 숲으로 가야지. 아니야, 숲은 벌레가 많으니 그나마 도시에 머무르자. 아니야, 도시는 시끄러우니 한적한 동네로 갈까. 그래, 그냥 집에서 선풍기나 마주 보고 있지 뭐. 남들의 피서를 구경해야지. 시원함도 더위처럼 옮는 거니까.

  코로나-19로 인한 펜데믹 사태 때 나는 옮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마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외출을 하지 않거나, 외출을 해야 한다면 마스크를 꼭 착용거나, 웬만하면 삼삼오오 모이지 않거나, 모여야 한다면 줌(zoom)으로 대체해보려 했을 것이다. 학교 수업도 중단되고 회사도 재택근무로 바뀌고 결혼식도 미루고 장례식도 가족끼리 조촐하게 보내는 판국에 한밤중에 야합하여 음주가무를 즐기는 행위는 그야말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밤낮으로 고생하는 의료계 사람들과 봉사자들, 가족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려고 고생했던 개개인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사회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나 또한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고, 애인과도 거의 일 년 동안 만나지 않았다. 모든 일들을 집에서 해결했고 배달을 시키면 꼭 비대면으로 받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나는 코로나에 걸렸다. 어떻게 어떤 경유로 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펜데믹 선언이 철회되고 경계 태세가 슬슬 낮아질 무렵에 걸려버린 것이다. 첫날엔 미친 듯이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코가 꽉 막혔다. 둘째 날엔 열은 내렸지만 갈증이 엄청 났고 여전히 코가 막혀 있었다. 셋째 날엔 코가 슬슬 뚫리기 시작했지만 미각과 후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넷째 날부터는 미각은 여전히 상실되어 있었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몸이 되었다. 다섯 째날부터는 미각도 조금씩 돌아왔다.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코로나에 다시 감염된 적은 없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 한 번은 걸려야 하는 거구나. 그래야 지나가는 것이구나. 백신을 두 번 맞든 세 번 맞든 코로나는 한 번 걸려야 다시 걸리지 않는 것이구나.

  글쓰는 일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글을 쓴다는 건 엄연히 따져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기록되니까. 글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까진 우리의 소관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이 언제 다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탄생시킬지에 대한 깊은 윤리적 의식을 동반해야 한다.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시는 문화와 인류와 평화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시는 문화와 인류와 평화에 공헌한다."(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1968.) 글을 쓸 때, 우리의 가슴 속에 내재된 책임도 이미 함께 동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말하고 싶다. 아무리 오래 된 사랑이라도 그것은 언제 어디선가 한 번은 기록된 사랑이므로 여전히 책임을 다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랑은 때로 미움으로 바뀌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믿음으로 전향되기도 하다가 표독스러운 집착으로 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옮아간 것들이 사랑의 역사라 치면, 고요의 땅 위에서 우리가 보내는 여름도 다 사랑이 만들어낸 것 아닐까. 가끔은 혼자 있고 싶다. 혼자 생각에 잠겨 이 우울을 다 흘려보내고 싶다. 그러면서도 "남들의 피서를 구경"하는 것은 내게도 한 번은 심하게 옮았고, 한 번은 섭섭할 정도로 무던히 지나간 사랑이 있는 탓이다. 그런다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랑도 없겠지만. 지금도 나쁘지만은 않다. 

 

 


  • 아자아자! 힘낼 때 쓰는 말. 그리고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을 때 쓰는 말. 강나리 작가의 글은 때로 침묵보다 더 침묵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으로 와닿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저는 앞으로 강나리 작가의 열혈한 독자가 되어 매번 리뷰를 할 생각입니다. 에세이와 리뷰. 새로운 방식의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물성과 해체를 찾아주세요. 새로운 연재, <아자아자>였습니다.
  • 강나리 : 식물학을 전공했다. 사람은 모두 얽혀 있고, 그 어디에선가 꽃처럼 사랑이 발생한다고 믿는다.
  • 김해경 : 물성과 해체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산문집 『뼈가 자라는 여름』(결, 2023)을 냈다.

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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