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슬기

시와 노가리 ep.9 눈을 마주쳤는지 모르겠어

윤병무, <-ㄴ지 모르겠어>

2023.08.20 | 조회 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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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비포(Before) 시리즈 중에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해?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조금 더 알고 싶은 누군가를 가늠해 보기 위한, 이를테면 미량의 호기심이나 사심을 품은 질문일 수도 있겠다. 종종 라는 타인의 역사를 알고 싶을 때가 있다. 너의 역사. 발견해주지 않으면 영영 묻혀 있을 타입 캡슐 같은 너의 이야기를 왜 캐내고 싶은 걸까. 잔뿌리들을 걷어내고, 더께로 쌓인 흙먼지를 털어낸 다음 열어볼 너의 속이 나는 왜 그리도 궁금할까. 그건 아마도 자세마저 없다면, 너를 한번 찾아서 열어보겠다는 여지마저 없다면, 네가 너를 절대 발설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를, 너의 역사를, 너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나 스스로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동의어다. 나는 너를 알고 싶고, 그리하여 나를 알고 싶다.

미국의 영화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3부작(비포 선라이즈, 선셋, 미드나잇)은 오랜 기간 관객들에게 회자되는 시리즈다. 굳이 다른 예술이 아닌 영화, 더욱이 그 많은 영화들 중에서 이 작품들로 너라는 타인을 가늠해 보는 이유는 바로 맞물림과 엇갈림에 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대로 이 시리즈의 첫 작품(비포 선라이즈)은 감독이 겪은 우연한 하룻밤에서 착상되었다. 어느 낯선 도시의 장난감 가게에서 만난 여자와의 우연한 하룻밤과 대화. 그 하룻밤의 이야기로 장장 18년의 세월이 걸린 3부작이 만들어졌다.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영화 내외의 맞물림과 엇갈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해야겠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이 영화들은 멸종과 시간에 관한 영화라는 것뿐. 너라는 타인이 저 먼 우주에서 날아와 내게 부딪히고, 나라는 종족이 멸종하고, 그렇게 너라는 흔적이 덮어진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진 태양계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득한 별이 수명을 다하기 일만년 전 이만 광년을 내달려와 우리에게 별빛으로 존재하듯 우리는 한때 지구라는 행성에서 밤하늘을 노래할 줄 알았던 직립보행 생물이었는지 모르겠어 공간이 시간을 떠날 수 없듯 시간이 공간을 지울 수 없어서 우리는 당시 생생했던 날들을 재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그곳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다가 있었고 그럴 거면 아예 끝장내라고 목 놓다가 이젠 운명을 치워달라며 무릎 꿇었다가 모래톱에 쓴 이름 삼킨 파도를 응망하다가 혼잣말 발자국만 남기고 떠났던 겨울 바다 길고 혹독한 빙결만 차곡차곡 쌓여 끝내 세상이 얼어붙었던 대사건이 있기 전의 현장을 우리는 당장인 줄 알고 살아내는지 모르겠어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불행이 걸어간 시절에 슬픈 옛사람이 꾸었던 악몽의 등장인물인지 모르겠어 질려 소리친 가위를 흔들어 깨운 손에 이끌려 불쑥 무대 뒤로 퇴장한 건지 모르겠어 여명에만 꺼지는 무대 조명 – 서녘 달빛이, 무릎으로 세운 홑이불 산맥에 그림자 드리워 흉몽의 능선을 조감도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얀 히말라야에 파묻은 얼굴인지 모르겠어 웬 목맨 귀신이 떠났던 대들보 찾아오는 소리냐며 후려치는 바람에 얼얼한 뺨이 벌게져도 손자국은 백 년 후 겨울날 홍시인지 모르겠어 앙상한 당신의 이름을 머리에 이고 겨울이 닳도록 탑돌이 하는지 모르겠어 당신과 나의 시간이 엇갈려 지나가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정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의 이름에 집 지은 지 오래 빗장 건 대문에 얼비친 얼굴이 바로 당신이자 나인지 모르겠어 잡풀 웃자란 마당이 무심한 자손의 묘소인지 모르겠어 행인이 서성이던 자리의 족음이 당신인지 모르겠어 새끼 기린을 뒤따른 바람이 나인지 모르겠어 당신인 줄 알고 밤길에 잘못 부른 이름인지 모르겠어 당신을 고인 물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여름을 보았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달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그믐을 울었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사자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포효를 들었는지 모르겠어 나를 구렁이라 명명한 이는 나의 허물을 주었는지 모르겠어 시간의 개울을 건너본 이들은 우리를 살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버릴 시간의 돌다리에서 굽이치는 물결을 만진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살음을 生人이라 하지 않고 人生이라 하는지 모르겠어 -윤병무, '-ㄴ지 모르겠어'

윤병무 시인의 시가 수록된 시집에는 유독 달을 제목으로 둔 시가 많다. 너와 내가 어떤 지점에서 맞물리고 또 어떤 지점에서 엇갈리고 있을까 가늠할 때, 내가 나를 알지 못하여 너를 부를 때, 달을 본다. 그렇게 빤히 쳐다본 달을 옮겨 쓰는 일이 내겐 이런 문장이고, 시인에겐 이런 시였을지도. 故 백남준 선생님의 <달은 가장 오래된 TV>가 떠오른다. 가장 오래도록 인간을 수신하고 중계해 왔다는 달. 머릿속에 뒤따르고 굽이치는 잔상과 윤곽. 어쩌나, 나는 가늠할 수 없다. 가늠할 수 없어서 비워둔다. 비워둔 것의 잔여만을 이곳에 옮겨 놓는다.

저 달이 얼마나 많은 눈빛을 수신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머금은 눈빛을 송신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너와 내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단지 우연, 하룻밤, 맞물림과 엇갈림, 이따금의 착각일지라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나는 당신의 훗날을. 혹은 그 시간의 반전을. 그러니까 너와 나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 윤병무,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문학과 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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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작가의 <시와 노가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잔 대신 시집을 듭니다. 술 대신 시를 나눕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시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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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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