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요 며칠, 비가 쏟아졌습니다. 쉴새없이 벼락이 터지고 천둥이 흘러나왔어요. 나는 무서웠습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이 지워지고 있었거든요.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빗물이 가진 투명은 아주 사소한 빛까지 잡아먹으며 스스로 빛나는 중이었습니다. 그 빛을 이정표 삼아 살금살금 발을 뻗는 중이었습니다. 집에 가려구요. 집에 가서 당신에게 안녕을 전하려구요.
오늘은 왠지 시를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마음의 수문을 열고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스스로를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무얼 할 수 있을까? 이유 모를 설렘과 벅차오르는 두 얼굴! 언제 떨어뜨렸는지 빗물을 따라 휩쓸려가는 저 그림자와 두 발로 당당히 버티고 선 오늘의 내가 서로 같은 표정을 하고 무엇인가를 횡단하고 있어요.
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내가 살아오면서 선택했던 비정형의 말들이 당신을 모험가로 만들고,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일이라면! 나는 지금 상당한 수준으로 안정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그것을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말들에 어쩐지, 믿음이 가질 않아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기 보단, 마음이 지금에 있어야 하니까요. 지금 당장 집어먹어야 할 마음이 내 곁에 없다면, 아무리 윽박지르고 욕을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때 당신에게 저질러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슬픔이시여. 당신 곁에 조용히 가서 잠들겠나이다! 하고 고백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은 월요일이잖아요. 다시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 기뻐요. 언제 한 번 만나면 안 될까요? 같이 시도 읽고 술도 마셔요.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고 가겠습니다. 소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지난 봄날에 찍었던 노을 바라보면서 내가 읽어주는 시를 가만히 들어보셔요.
생일이 끝났다
누군가 풀고 간
손목시계의 움직이지 않는 초침을 보고 있다
낡은 유리 위에 먼지가 내려앉고
카펫과 식탁보를 들출 때마다
공기는 무게를 잃고
나는 혼잣말이 늘었다
조금씩 바뀌는 태양의 자리
몸이 단단해지는 시간
아무도 모르게 사는 내가 왠지 웃겨
밀대를 쥐고 밤새 부러진 빛을 바깥으로 훔쳐낸다
바깥의 기분은 늘 빛나는 일로 가득하다고
오늘은 어제보다 뜬눈으로 지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좋아요, 좋아졌어요,
어제는 그런 얘기를 했었지
컵의 손잡이 부분만 남겨둔 채
오래도록 고민했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 날
고양이들을 기르고
빈 책장에 올라 타 천천히 잠드는 아이들을 어루만지는 하얀 손
태양 가까이 있는 바로 그,
하얀 손이 되고 싶다
2023.6.12
하얀 손으로
김해경 드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는 매주 월요일 친애하는 당신을 찾아갑니다. 광연과 해경이 주고 받는 편지 속 친애하는 당신의 삶에서 부디 안식을 찾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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