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충무로에 갔었습니다. 극장과 인쇄소가 즐비한 큰 거리 뒤에 고즈넉히 자리한 시장에 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내 인생에 성질이 났습니다. 행복을 인정하지 않는 내 성질머리에 분노했습니다. 충분히 희망적인 상황에도 비관을 탐닉하는 내 어리석은 욕망에 진절머리 났습니다.
친구들에게 주려고 가방에 담아 온 내 책을 다시 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부끄러운 문장들. 거짓말 같은 과거들. 불에 타버리다 만 사진 같은 그리움들. 나는 아마도 한동안 내 책을 다시 펼쳐볼 일 없을 듯 싶습니다. 혼미합니다. 건강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가끔은 내 인생에 대해 하염없이 남탓을 하고 싶어요. 하염없이 억울해 하고 싶어요.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라서 내가 이렇게 된 거라고, 욕을 하고 싶어요. 그러나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뉘우칩니다. 내 인생을 무책임하게 다룰 만큼 문학이나 예술이 좋은 건 아닙니다. 문학이나 예술 따위에 내가 절뚝거려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누군가로부터 존경받거나 시기 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인생과 예술 그 어느 하나에도 매진하지 못했습니다. 이 미진함. 이 미안함. 나는 부끄럽습니다. 옳은 작품 하나 만들지도 못하고, 웃기를 바라다니요.
오늘은 저 끝에서부터 비틀거리며 걸어왔습니다.
언제 쓰러질까요. 이 공든 탑. 이 비참한 탑.
죄송합니다.
2023.08.29
충무로에서
김해경 드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는 매주 친애하는 당신을 찾아갑니다. 광연과 해경이 주고 받는 편지 속 친애하는 당신의 삶에서 부디 안식을 찾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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