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의 특허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마 둘 중 하나일 텐데, 태초에 죄책감을 느낀 사람이거나 태초에 타인에게 상처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이 지옥같고 찝찝한 감정을 정의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스스로 느껴지는 텁텁한 마음을 알고 싶어서, 하나는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벌주기 위해서.
하지만 세상 많은 것들이 이름 붙어 지고서야 존재되는 것처럼. 죄책감은 정의됨으로써 힘을 가졌고, 나는 그렇기에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묘함이나 괜함 정도로 분류되었을 마음들이 이제는 전부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뾰족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만일 죄책감이 누군가의 재미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어떤 일에도 죄책감을 들이대는 성격에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니, 이것은 죄가 분명해! 와 같은 류의 생각이다. 혹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죄는 빠져있는 죄책감. 떼내면 떼낸 쪽 소매에 붙어 있는 도깨비바늘 처럼, 나는 이리 저리 죄책감을 붙이고 다닌다.
죄책감없이 사는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인 적이 있다. 나는 열심히 내 발에 무게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 그것이 더 부럽고 억울한 마음인 적이 있었다. 그치만 나는 또 내 발을 무겁게 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 자유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적에, 나는 이제 죄책감을 떨쳐내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불분명한 화합물에서 순수한 물질을 추출해 낸다는 것은 그것의 자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애매하고 복잡함 사이에서 선명히도 꺼낸 죄책감은 내 무엇의 연료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구태여 무거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죄책감의 특허권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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