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면 앞으로 간다. 우리는 어떤 목적지로 가장 빠르게 가기 위해 앞으로 간다. 옆으로 달리거나 뒤로 달리는 것은 가능할 뿐이다. 원하는 곳으로 가는데 필요한 것이 속력과 방향이라 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감으로써 속력을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앞으로’ 가는 행위는 방향감각을 마비시킨다. 스위스의 구불구불한 산악열차를 타며 나는 곧 죽어도 앞으로 가는데 어느새 산을 몇 바퀴는 돌아 정상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 앞 칸은 열심히 왼쪽 오른쪽 꺾여 가는데 내가 앉아있는 칸은 앞으로만 가는 듯하다. 나도 분명 앞칸을 따라 가고 있을 텐데.
방향감각의 마비는 방향성의 상실로 이어지기 쉽다. 반대 노선의 열차를 타면, 가고 싶은곳과 반대방향이지만 열차는 앞으로 달린다. 과거에 빠져 사는 사람도 과거를 향해 앞으로 가는 사람이다. 뒤는 뒤돌면 순식간에 앞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꾸 방향을 놓친다.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앞칸을 만난다면 뒤따라 앞으로만 가는 듯 하더라도 산의 정상이겠지만, 동시에 탄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상이 좋고 탄광이 나쁘다 뭐 이런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무엇보다 앞칸만 따라간다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앞칸이 가고 싶은 곳을 갈 것이다.
원하는 곳을 가기 위해선 속력도, 방향도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날때부터 앞으로 가야 가장 빠르게 태어났으니 속력을 늘리는 방안에 대해 생각할 필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방향일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탈선이 아니라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요즘은 의심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모래성을 쌓아놓고 손으로 조금씩 덜어내다 가운데 꽂혀 있던 깃발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처럼, 의심은 때론 큰 덩어리 같은 일에서 중심으로 가까워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다. 깃발이 쓰러지면 안되겠지만 말이다.
확신은 이를테면 깜깜한 방안 탁자 위 사탕바구니에서 내가 원하는 사탕을 쥐는 일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사탕들 중 무엇을 원하는지 골라내려면 택 1보단 외 1이 편하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많은 선택들의 아웃라인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부터 어떤 마음이 들면 심사대에 올리듯 마음을 의심할 수 있는 여러 외적 내적 요소들을 꺼내 든다. 내가 주변의 누구를 신경 써서 그런 것은 아닌가. 지기 싫은 마음에, 일종의 열등감에 드는 마음은 아닌가. 하다못해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닌가. 그렇게 불편한 청문회를 진행하다 보면, 때로는 불순물이라 생각했던 상황들마저 마음에 합쳐지기도 하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반대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가끔은 곧게 가는 기차 칸도 의심해보려고 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마음 정도는 지니려 한다. 여권처럼, 캐리어를 잔뜩 든 유럽 여행도, 작은 배낭 하나 들고 가는 일본여행에도 꼭 가방 속 작은 주머니에 넣는 여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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