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하는 방법

#39. 거울엔 내가 있고 그 밖엔 내가 없고

2024.09.28 | 조회 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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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저기에 있다. 나는 엄마의 아들 아빠의 자식으로 태어나, 동생의 형이다. 나는 삼촌의 조카고, 할머니의 손주고, 장인어른의 사위이고. 한국에서 태어났고 된장찌개를 좋아하고 집 뒷산의 이름을 딴 집 앞의 초등학교를 나왔고, 중학교땐 축구부 벤치였고 고등학교땐 3년 내내 3반이었고, 출석번호는 아빠탓에 늘 10번 안쪽이었고, 자기소개는 할때마다 무서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름) 이구요. 나이는 (나이)살 이구요. 저는요..저는요..

무서우면 나열하라고 어디선가 배웠고, 나는 내가 누구의 누구인지 나열하기 시작했다.

저는 (엄마 이름)하고 (아빠 이름)의 아들이구요. 저기 앞에 있는 (아파트 이름) 아파트 4차 103동에 살고 있구요. 저는 작년엔 10번이었는데 이번엔 8번이구요. 저는 (이름)의 형이에요. 걘 1학년 2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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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먹고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덧붙이는 편이 낫다는 것을 배웠다. 다만 자기소개가 싫다는 사실만 빼고 말했다. 한번은 문학동아리에 들어가서는 

저는 요즘 소설 읽는 게 부쩍 재밌어서요. (작가이름)의 (소설이름) 재밌게 읽었던 것 같아요. 시...는 좋아는 하는데 어렵더라구요. 여기서 조금씩 알아가고 싶어요.  그거 말고도 모임이나 술자리도 좋아하니까 자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이가 더 먹고는 자기소개를 1000자를 써야 했고 나는 자기 소개로 직업이 결정되는 것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돈은 벌어야 했으니까, 다행히 문학 동아리에서 소설을 잔뜩 써보았기 때문에

타겟 소비자를 명확히 하여 그들의 니즈를 바탕으로 제품을 기획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의 제 모습을 언제나 꿈꿔왔습니다. 귀사에서 꼭 그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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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벌어서 아쉬운 소리 할 사람도 없다. 더 더 나이를 먹으니까 자기 소개를 할 일이 없어서 편하다. 누가 자기소개를 한다 해도 이젠 나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 자신감이 넘친다. 나는 자기 소개의 달인이 되었다. 저기 내 손주가 온다. 그래, 자기소개 하는 법을 알려 줘야겠다.

(손주이름)아, 너는 누구냐 자기소개 한번 해봐라

저는 토끼에요. 뛰어다니거든요.

내 평생에 걸쳐 완성한 그 지긋지긋한 자기 소개가 토끼를 이길 자신이 없다. 큰일.


추신 / 글

이름도 관계도 빼고 나를 소개한다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굳이 그것들을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것들만이 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무엇인지 고민하는 새 생기는 주름이 저를 잘 설명해주길 바랄 뿐이에요. 내가 누군지, 무엇인지 찾지 못하거나, 찾지 않더라도요.
이번 주는 멀리서 공부하는(친구이름)이 그려준 그림입니다. 28주차에도 봤으니 구면이네요. 다음주엔 다시 우리의 그림작가님의 그림으로 옵니다.

추신 / 그림 

나이가 들수록 자기소개는 나열의 기술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으로 사는 법을 터득하는 과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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