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 조국 기도문
저는 오늘 두개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전역하기와 전역날 조국 기도문 하기. 총도 쏠 줄 모르던 훈련병 시절, 4개 중대 인원 앞에서 본인이 전역날이라며 조국 기도문을 읊던 조교가 생각납니다. 그날 그 조교가 얼마나 얄밉고 부러웠는지, 동시에 얼마나 즐거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들 앞에 서 있는 것은 전부 그 조교 탓입니다.
자대에 처음으로 전입 온 날, 식당에서 밥을 먹다 여기 있는 놈들 전부 가야 내가 집에 간다는 생각에 느낀 막막함을 기억합니다. 정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며 느낀 서운함과 답답함도기억합니다. 근무 순번이 겹쳐 유난히 피곤한 날에 선 불침번도, 기상나팔에 일어나 눈을 부비며 밤새 차가워진 군복을 입던 일도, 부식한다며 매주 세번 옆중대보다 한시간 일찍 업무를 시작했던 날들도 전부 기억합니다.
어둡고 까만 일들만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녁메뉴로 청국장이 나온다며 신나서 기다리던 일, 행군 도중 마셨던 차가운 노란색 게토레이의 맛, 끌리듯 나가 뛴 풋살에 어느새 진심이 된 제 자신, 일년 반 동안 짤그락거리는 군번줄을 차며 있었던 소소하지만 소중한 일들을 분명히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기억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느덧 저는 민방위도 끝난 아저씨들이 입대일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전역한 형들이 펑펑 내리는 눈을 마냥 예쁘게만 볼 수 없던 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전역날, 앞으로 다시는 들어올 수 없을 위병소문을 박차 나가는 기분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조국 기도문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지의 안녕을 비는 것이지만, 저는 오늘 떠나는 만큼 여러분들의 안녕과 무사를 빌겠습니다. 언제나 아프지 마시고, 다치지 마십시오. 또 행여나 몸보다도 마음이 힘들고 아픈 분이 계신다면, 분명히 꽤나 빠르게 지나갈 날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홍천의 겨울은 무지하게 춥습니다. 어디 괜히 미끌리거나 자빠지는 일 없이 무사히 겨울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다못해 손등이나 입술이 트는 일도 없으면 좋겠습니다. 군대는 거스러미같이 사소한 일도 사회보다 몇배는 불편하니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꽤 남은 군생활을 응원합니다.
예전부터 전역날 조국 기도문 15분 할거다, 감사한 일 75가지 말할거다 유난을 떨었지만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추운 아침 점호의 1분 1초가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동기와 후임들에게 위병소앞까지 배웅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렵습니다.
그럼 잘 지내십시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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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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