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맥주와 핏대

#05. 얼기설기, 옴직거리다

2025.02.03 | 조회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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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어

매주 작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얼기설기

: 가는 것이 이리저리 뒤섞이어 얽힌 모양

: 엉성하고 조잡한 모양

: 관계나 일, 감정 따위가 복잡하게 얽힌 모양

 

  • 단어를 찾은 곳

달떡같이 희다는 게 뭘까. 궁금해하다가 일곱 살 무렵 송편을 빚으며 문득 알았었다. 새하얀 쌀 반죽을 반죽해 제각각 반달 모양으로 빚어놓은, 아직 찌지 않은 달떡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곱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얼기설기 솔잎들을 매달고 접시에 담겨 나온 떡들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고소한 참기름에 반들거리는, 찜 솥의 열과 김으로 색깔과 질감이 변형된 그것들은 물론 맛이 있었지만, 눈부시게 곱던 쌀 반죽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말한 달떡은  찌기 전의 달떡인 거야. 그 순간 생각했었다. 그렇게 깨끗한 얼굴이었던 거야. 그러자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한강, 흰, 21쪽

  • 나의 단어라면
하늘에서 가는 실 조각들이 떨어진다. 여기저기 떨어지는 실 조각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집어 한데 모은다. 얼기설기 모여든 실들은 둥글고 예쁘다. 우연히 떨어진 실 조각과 내 마음대로 집어들어 만든 뭉치.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랬다. 할 일없어 돌아다니던 길거리는 내가 급한 약속이 없어서인지 고요하게 아름다웠다. 코너를 돌아 내려가니 그 고요가 지루하다는 듯이 락 음악을 뿜어대던 술집이 있었다. 그리고 이끌리듯 들어갔다. 칵테일 바가 아니라며 메뉴따윈 없다고, 보이는 대로 시키라던 백발 장발의 아저씨에게 겁이 나 이름 모를 맥주를 가리켰다. 이곳 맥주들은 아무래도 조금 쓴 것 같다. 시간이 일러 손님은 나 혼자였고, 지상에서 조금 들어 내려간 형태의 가게와 동굴같은 인테리어 때문에 나는 아지트에서 접선하는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옴직거리다

: 몸이나 몸의 일부가 작게 자주 움직이다. 또는 몸이나 몸의 일부를 작게 자주 움직이다. ≒옴직대다.

 

  • 단어를 찾은 곳

그 아기가 살아남아 그 젖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악착같이 숨을 쉬며, 입술을 옴직거려 젖을 빨았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고 쌀죽과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한 여자가 된 뒤에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 그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한강, 흰, 36쪽

  • 나의 단어라면
한참을 떠들다 내일 밤 이곳에서 라이브 공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소가 협소해서 간이 드럼과 키보드 한대로 하는 공연. 나는 내일 할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고, 내일은 늦게 일어나 하루를 늦게 시작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밤, 동굴같은 술집에서 노래는 시작됐고, 대체로 덩치가 크고 나이가 든 단골손님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있으면 춤을 추고,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하고, 가수는 핏대를 세우고. 나는 이 일이 우주에서 아주 작은 옴직거림 같은 일일 테지만 지금 나에게는 무언가 가득 찬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우연한 실가닥을 내가 잘 주운 탓이라 생각했다. 우연히는 행복하기 가장 좋은 단어라고도 생각했다.

추신

오늘은 두 단어의 예문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제 에스토니아 여행에서 있던 일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쓰지 않던 단어들을 문장에 넣는 일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얼기설기 굴러가는 일상이라도, 늘 몇 가닥의 행복이 엉겨 붙어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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