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憮然)히
- 단어를 찾은 곳
그 개는 계속해서 그녀를 무서워했다. 일주일이 지나 이제 익숙해질 만도 했던 마지막 날에도 그녀를 본 순간 몸을 낮추고 뒷걸음질쳤다. 걷어차이거나 목을 졸린 것처럼 옆구리와 목을 스스로 비틀고 외꼬았다.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사슬이 시멘트 바닥에 끌리는 낮은 소리 뿐이었다. 여러 달 얼굴을 익혔을 어머니를 보고도 걔는 뒷걸음질 쳤다. 괜찮다, 괜찮다니까. 낮은 소리로 달래며 어머니는 무연히 그녀를 앞질러 걸어 갔다. 끌끌 혀를 차면 중얼거렸다...............모진 일을 오래 당했던가보다.
한강, 흰, 62쪽
- 나의 단어라면
여남은
- 단어를 찾은 곳
겨울이 유난히 혹독한 이 도시에서 그녀는 십이월에 밤을 통과하는 중이다. 창밖은 달 없이 어둡다. 아파트 뒤편의 자그마한 공장 건물은 보안 때문인지 여남은 개의 전등을 밤새 밝혀놓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등들이 띄엄띄엄 만들어놓은 고립 된 빛의 공간들을 그녀는 지켜 본다. 이곳에 온 뒤 부터, 아니 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녀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 해도 창밖은 지금처럼 캄캄할 것이다, 요행히 좀 더 오래 잠들었다. 깨어날 수 있다면, 더디게 밝는 새벽에 푸르스름한 빛이 암흑의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스며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저 불빛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 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한강, 흰, 83쪽
- 나의 단어라면
추신
책을 몇번이고 읽다보니 보이지 않던 재밌는 지점들이 보입니다. 흰에 나오는 모든 숫자들은 다 한글로 적혀있다는 걸 아셨나요? 일곱, 스물여섯,십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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