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쓰던 단어들로 내 노트를 다시 채우고 싶다. 소중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하나같이 부끄러워 보인다. 좋다고 생각했던 비유들이 난해해 보인다. 안쓰던 말들로 줄을 채워보면 뭔가 새롭지 않을까 하다가도 결국 내 머릿속에서 나온 말들이라 그렇게 특별히 새로운 말들은 없는 글을 보며 다시 답답함을 느낀다. 웃긴 말이지만 권태기다.
누구 이름 같기도 한 권태는, 진짜 사람인냥 뚜벅뚜벅 어느 날 찾아온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무표정의 아저씨가 망치를 들고 와서, 책상 가득 놓여 있는 내 술병이나 컴퓨터나 그런 것들을 다 때려 부시는 느낌이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벙쪄있는 사이, 그 아저씨가 가버려 화도 낼 수 없다.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 권태씨는 갑자기 나를 다 헤집어 놓고 갔다.
권태씨를 만난 나는 어이도 없고 기분도 나쁘지만 제일 슬픈 건 내 부숴진 물건들이다. 다음날 밖에 나가 어찌저찌 다시 그 물건들을 사 왔는데, 예전 같지가 않다. 재미가 없다. 처음엔 그냥 흥이 잠시 깨졌던 일이겠거니 했는데, 아닌 것 같다. 시간이 지나니까 권태씨 때문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원래부터 재미없던 일들이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이상하다. 권태가 나를 꿈에서 깨운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즐거운 것이 없는 것보다 즐거웠던 일이 더 이상 그렇지 않을 때인 듯 하다. 늘 즐겁고 설레며 시작했던 게임이 더 이상 재밌지 않아졌을 때, 단골 국수집의 국물 맛이 예전같지 않을 때, 쳐다만 봐도 웃음이 나던 사람 앞에서 웃어야 할 이유를 찾을 때마다 나는 한층 우울해짐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샌가 내 책상엔 다른 물건들이 올라와 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은 사진 한 두장 정도면 충분하다. 문득 이번에 올라온 물건들도 사진 한장으로 남겨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예전에 찾아온 그 권태를 생각한다. 그 사람은 꼭 다시 올 것만 같다. 그러면서 언제 그 사람이 올까 조급해하며 물건들을 만지작댄다.
평생토록 즐거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평생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알기도 전에 지겨워진다. 어쩌면 내 취미는 글을 쓰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평생 즐길거릴 찾는 것 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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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작은 아이, 김진형
봄이 되니 의미없이 이유없이 권태씨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 같습니다. 쳐다만 봐도 웃음이 나던 사람에게서 웃을 이유를 찾으려 하니 괜히 씁쓸하네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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