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인데 비가 왔다. 어젯밤도 비가 왔는데, 어젯밤 비와 같은 구름일는지. 창 밖은 온통 젖어 있다. 나는 하늘이 빼앗은 내 땅을 그리워하다 하늘까지 시기하는 무지막지한 질투심에 새삼 염치없다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워졌다. 내가 꿈틀대며 만들어 낸 문장들이 그 이야기엔 수도 없이 널려 있다. 나는 그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들의 문장을 판다. 생각해보면 남의 괴로움은 살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스치는 바람에도 아파하고 어떤 사람은 천금같은 죄를 지어도 행복하다. 나는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들과 같은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도 문장만 골라 모아 파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아무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영웅담마냥 그들의 문장을 사는 것은 그들을 열심히 질투하게 만드는 일밖에 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질투는 소유의 애물단지 자식이다. 하지만 질투는 제 어머니를 닮지 못하고, 어쩌면 어머니의 결핍을 닮아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는 것에서 질투를 느낀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것에 대한 안정감을 사는 행위일 텐데, 질투는 내 안정감이 누군가에게 볼모로 잡혀 있다는 감정인 듯하다.
더군다나 아들을 낳을 때 아들의 키나 얼굴이나 성격을 알지 못하고 낳는 것과 같이, 내가 무엇에 얼마나 질투를 느끼는지는 스스로도 알기 어려운 문제이다. 정확히는, 질투가 어디로부터 불붙어 오는지를 알 수가 없다. 내 애인이 다른 이성과 밥을 먹는 것을 질투하는 데에 어떤 명료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늠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질투를 철이 든 남자 아이가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대하듯이 대해보기로 한다. 부끄러움과 따뜻한 인정 그 사이 정도의 태도이다. 내가 가진 것은 보지 못하고, 끝없이 남의 것에 눈독을 들이던 순수한 욕심의 시간 또한 내가 가진 것 중의 하나라고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 시간들을 통해 내가 어떤 마음으로 무언가를 소유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반가워하기로 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하고, 갖지 못해 속상해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남의 것이 못나야 내 것이 잘난다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튤립이 몇 송이인데, 남이 예쁜 한 송이 있다고 질투해서는 나만 지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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