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윤동규 정책을 바꾸기로 했습니다(퍽이나 오래 유지했다마는). 애초에 주기적으로 힘 주어 글을 쓰는 연습이 목표였는데, 1000자짜리 허섭 쓰레기 글 4~5편 묶는다고 해서 힘이 들어가는건 아닌거라 느껴집니다. 차라리 힘 주어 쓴 글 한 편이 더 목적에 맞지 않을까요? 읽는 입장에서도 부담감이 좀 덜 하구요. 한 주에 한 편의 에세이라니, 이리도 게으를 수 있는가 싶지만 실질적으론 훨씬 더 많은 글을 쓰고 있으니 안심하시오. 중요한건, 그 많은 글들 중 단 한 편만 메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쓰는대로 족족 보내다보니 주간 윤동규가 어느새 윤동규 글쓰기 놀이터, 연습장이 되는 기분입니다.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작품을 만들어 보내고 싶어요. 그 작품의 질이 낮고 높고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작업물이라는게 중요합니다. 그걸 놓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000자의 제약은 이 시간부로 폐지합니다. 제약은 단 한 편만 기고할 것. 한 주에 가장 힘을 주어 쓴 글을 기고할 것. 두가지로 정합니다.
그건 그렇고, 맞춤법을 지키기가 싫습니다. 기본적으로 글에 대한 이야기인데, 말로는 괜찮은 것들을 글로 옮기면서 까다로워지는게 영 꼴보기가 싫습니다. 띄어쓰기가 바로 그 경우에요. 왜 띄어 써야 합니까?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때문에요? 평생 들어가십쇼, 그 가방. 실질적으론 오해가 생길 만한 요소는 만에 하나 될까 말까고 오해가 생긴다 하던들 그건 글의 맥락 문제지 띄어쓰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는지 방에 들어가는지도 헷갈리게끔 쓴 글이라면 이미 개같이 말아먹었단 뜻입니다. 애초에 말을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열다섯개만 줘"라고 이야기 하자, "아니. 열다섯 개 라고 말해야 해"라고 지랄하는 인간 본 적 있나요? 확실한건 그 인간이랑 친하게 지내지는 마십쇼. 글은 말의 전달입니다. 글이 글로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어떤 글이든, 그것을 보는 즉시 입이 아닐 뿐 머릿속에서 읽고 있으니까요. 읽지 못하는 글은(제 경우엔 한글을 제외한 모든 글입니다) 그림과 다름없다고 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림인데 맞춤법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리고 어차피 말인데, 글의 맞춤법이 뭐가 중요합니까? 말로 옮겼을 때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글입니다. "열다 섯개만줘"라고 적는건 잘못된거죠. 아무도 저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열다섯개만줘"는 썩 괜찮습니다. 화자가 성미가 급하다거나 말을 빠르게 한다는 설정이 있으면 금상첨화죠. 소설이 아닌 에세이나 영상 자막 같은 경우? 간단합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곧 화자입니다. 화자의 억양과 속도에 따릅니다. "절때로 안돼!"는 틀린 자막이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화자가 절때, 라고 발음하는 사람일 수 있지요.
물론 이렇게 극단적으로 삐딱선을 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나도 뭐 처음부터 이정도는 아니었어요. 지킬거 잘 지키고, 서로 약속한거니까. 좋은게 좋은거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먼저 지랄 염병을 떤건 너희 맞춤법 수호자들이잖아요. KBS EBS 자막이라면 모를까, 유튜브 자막에 엄금진 하지 말라 이겁니다. 한때는 그런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놓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어의 파괴라고 혀를 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어가 그렇게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가치라면, 왜 나랏말싸미는 더 이상 쓰지 않는 말입니까? 언어는 파괴가 아닌 진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글의 흐름을 따르는게 아닌 말의 흐름을 따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주구장창 바래다 바래 바래바래 운동을 펼친다면, 언젠가 그 역겨운 친해지길 바라 도 제 자리를 찾지 않을까요? "바래는 잘못 쓴 표현이니 바라 라고 쓰길 바라!". 아 알겠으니까 저리 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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