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윤동규 49주차

과정을 위한 결과

2024.02.26 | 조회 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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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윤동규

한 주간 쌓인 쓰레기들을 공유합니다

카메라를 고르다보면, 결국 가장 좋은 기능의 장비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장비를 보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 찍은 결과물을 보게 되니까요. 풀프레임으로 노이즈 없고 어두워도 쨍하게 잘 나오는데, 10비트에 4K 120P가 논크롭이라고? 주구장창 유튜브에서 촬영본만 하루종일 찾다 보면, 어느새 마음 속 장바구니에 수백대의 씨네캠들이 담겨 있습니다. 뭐 카메라 뿐이겠습니까. 렌즈는 뭐 지 마스터니 조리개니 심지어 아나모픽 렌즈나 FD 렌즈에 꽂혀서, 바디보다 더 큰 돈을 쓸 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완벽합니다. 완벽한 결과물을 내는 바디와 완벽한 렌즈가 합치면, 그것이 완벽한 장비가 아닐까요? 그런 장비를 쓰는 나는, 마치 완벽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불행하게도, 그것은 모두 손에 잡히는, 실존하는 물건들입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라면 할 말 없어요, 그냥 제일 좋은거 쓰면 됩니다. 카메라는 다릅니다. 그것을 드는 사람이 있고, 들고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포커스를 맞추고, 주밍을 들어가고, 렌즈를 교환하고, 하다못해 촬영장까지 장비를 들고 이동합니다. 조상님이 도와주지 않아요. 내가 직접 들고 다닙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간다고 치면? 차라리 캐리어를 하나 더 끌고 다닐지언정, 씨네 카메라를 추가한다는 심리적인 압박은 쉽게 극복하기 힘듭니다. 

일 할 때만 쓸거니깐 상관 없지 않아? 물론 저는 일 할 때만 쓰진 않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결과물을 위해 내가 장비에 맞출지, 내 환경에 맞게 결과물을 조정할지는 결국 우선순위의 차이입니다. 저는 런앤건 스타일의 촬영을 즐깁니다. 피사체 자체가 무언가 약속된 촬영이 아닌, 순간의 발견인 경우가 많아요. 그럼 그때마다 바디에 렌즈 끼우고 ND 필터 씌운 뒤 초점 맞추고 찍는 것 보다 캠코더는 어떨까요? 결국 제 손에 장갑, 제 발에 신발입니다(이런 말 없습니다 지어냈어요). 손에 익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니, 최소한 손에 익는 것은 결과물의 퀄리티에 못지 않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는건 이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결과물은 사실,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 궤변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완성된 영상을 위해 촬영하지 않습니다. 촬영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촬영을 합니다. 결과물은 결국 그 삶의 과정일 뿐입니다. <결과물>이라는 단어에 현혹되기 쉬운데, 그것은 마치 수능 성적을 위해 학업을 쌓아가는 삶과도 같습니다. 완성된 뮤직비디오나 영화, 광고가 제 아무리 중요한 결과물 같아도 그것을 만드는 삶이 그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게 과연 옳은 삶인가? 생각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결과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갈지. 뛰어난 삶을 살아갈지. 여기서의 <뛰어남>은 결과물이 감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카메라 디자인이 너무 예뻐"같은 이유로, 더 많이 들고 다니게 되고. 그걸로 더 많이 찍거나, 최소한 찍는 나를 뽐내기만 해도 근사한 이유가 됩니다. 결과는 과정일 뿐입니다. 과정만이 결과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단순 카메라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조금 대입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멋지고 근사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청렴결백하고 유머러스하고, 착하고 배려심 깊은데 성실하고 검소하고 모험심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말하자면 씨네 카메라로 찍은 죽이는 결과물을 얻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씨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삶은 혼자서 살아가지만, 씨네 카메라는 대여섯명이 팀을 이루어 운용합니다. 일단 혼자서 못하는걸 혼자서 한다는 각오 자체가 무모합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절박함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보통 착하고 배려심 많은 삶을 절박하게 추구하진 못합니다. 결국은 나른하고 게으르고, 한심한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결과만을 추구하는 삶. 아니, 결과만이 결과라고 생각하는 삶의 맹점입니다. 저의 삶의 방식을 조금 자랑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이 없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내가 될 모습만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저는 저를 잘 아니까,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저를 잘 아니까, 이 정도 바라는게 욕심은 아니잖아?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게 이상입니다. 그게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 싫어하고, 게으르고, 나른하고, 안일하고, 괴팍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삶. 그 과정이 가장 이상적인 인생의 태도가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갈수록 추구하는 삶은 바뀝니다. 잡지에서 누구 인터뷰를 봤느냐에 따라 바뀌는게 아니라요.

최근에 산 캠코더에 아쉬운점이 발견될수록 괴로웠습니다. 더 좋은 장비를 산게 아니라, 원래 잘 쓰던 좋은 장비에서 다운그레이드 시킨거라서요. 아 이럴거면 예전 장비로 돌아갈까? 유혹이 될 때 마다, 그것으로 촬영하는 삶을 선명하게 상상합니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는게 중요해요. 어떤 카메라 가방에 넣을 것이며, 배터리는 어떻게 교체하고. 피사체는 어떤걸 찍고 있는지, 그때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그때의 내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떠올려봅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그려봅니다. 이걸로 찍으면 잘 나오니깐 꾹 참고 쓰는지, 아니면 그런거 상관 없이 즐겁게 찍는지. 둘 중 뭐가 더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결과는 아주 명확했기에, 의심의 여지 없이 달려가기로 했습니다. 아니 의심은 계속 할거긴 하지만, 결과물이 아닌 결과물을 만드는 삶을 의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질구질하게 긴 글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내가 즐거운 삶을 살아가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뻔한 이야기네요.


 

'고해성사 겸 성찰 및 질문' 제목 : 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외국에 사는 사람과 사귄 적이 있습니다. 헤어지기로 결심한 당시에는 장거리 연애에 대한 회의감과 상대방이 연애를 위한 노력을 안 한다는 생각이 들고, 상대방의 술 버릇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실망 등 이유로 제가 헤어지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에 연락은 약 1년 가까이 계속 했으나, 상대방의 말투 등의 변화가 신경 쓰이고, SNS를 계속 보게 되는 등 저도 제 행동이 이해가 안 갑니다. 고해성사를 더 하자면 제가 헤어지자 해놓고 무슨 마음에서인지 답장 속도를 재촉하는 등 모질게 대하기도 했네요. 헤어지자 한 것 만으로도 이미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 이후로도 모질게 대한 건지 제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는 제가 역지사지를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저야말로 역지사지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재결합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지만 왜 자꾸 이해 안 가는 행동을 반복하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일종의 책임 없는 쾌락을 누리고 싶은 걸까요? +) 헤어진 이후로 저나 상대방이나 애인이 생긴 적은 없습니다.

오랜만의 사연이 반가워서 모처럼 답변합니다. 선생님의 고민은 근본적으로 오늘의 본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헤어졌다는 결정을 내린건 선생님의 <결과>지만, 그 결과를 얻어내기까지의 수많은 고민과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게 이게 맞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모두가 통째로 선생님을 이루는 구성 요소입니다. 결정을 내렸다는 이유로, 그러한 과정들이 싹 다 사라지는 것일리가 없습니다. 내가 결론을 내렸어도,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가 하나는 아닐겁니다. 이별한 이유는 서술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자신의 이유에는 이유를 말씀하시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거나, 인정하기 싫거나. 혹은 사소한 이유가 지나치게 많아서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사실 우린 모두 알고 있거든요. 연인과 헤어질 때, 이제 이 인간이 당장 죽어도 상관 없는 무가치한 인간이라서 헤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이유를 뛰어넘는 무언가가가 있었기에, 괴로운 선택을 합니다. 그 괴로운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애써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멀리 하는 것이지, 이제 헤어졌으니까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했다고, 브라질 축구팀이 해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처럼요. 

다시 말하지만, 이유는 모릅니다. 혹시나 누가 옆에서 자기는 안다고 깝치는 인간이 있다면 멀리 하십시오. 이유는 본인만이 압니다. 그걸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다면, 그냥 모르는 채로 두는 것도 정답입니다. 아는게 과연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리고, 책임 없는 쾌락이 그렇게 나쁜걸까요? 역지사지가 결여된게 그렇게 잘못된걸까요?

재결합 하고 싶진 않지만, 너와 이것 저것 하고 싶어. 이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사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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