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지도 않을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정확하게는, 언젠가 읽을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당장 읽지 않을 것이라는걸 알고 있어요. 읽다 만 책도 수두룩하고, 언제 읽어줄거야? 쳐다보는 책들이 책장 한 가득입니다. 더군다나 애초에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못 됩니다. 글보다 그림이나 움직이는 그림, 혹은 말이 더 편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삽니다. 요즘엔 종이책을 그만두고 전자책만 구매하고 있지만, 요지는 산다는 행위니까요. 산다. 사서 가지고 있는다. 사서 가지고만 있는다. 이게 낭비가 아니면 무엇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낭비란건 결국 나의 투자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뜻할지도 모르겠어요. 또는 그 가치가 너무 낮거나 의도했던 것과 다른 상황이요. 음식으로 치면 사놓고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는 것도 낭비지만, 끔찍하게 맛이 없는 것 또한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책이 끔찍하게 재미가 없는 것은 낭비일까요? 아니요, 사실 책은 재미를 위해 읽지 않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읽어요. 그게 허구의 이야기든, 어떠한 정보를 알려주든. 자신의 생각을 다루든 소재는 다양하지만 기대하는 것은 같습니다. 작가의 생각을 읽는 것이에요. 그러니 재미가 없다는 것 보다, 그 생각이 한 없이 구리고 형편없는 경우를 낭비라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틀렸습니다. 형편없는 생각을 얻는다는 것이 중요해요. 나는 요리사가 아니기에 맛 없는 음식을 먹으면 낭비로 치부하지만, 어떤 맛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입장에선 수업료를 지불하고 어떻게 하면 안 좋은 맛이 만들어지는지 찾아가는 과정이 되잖아요? 저 역시 구린 생각을 피할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좋은 생각이길 원하지만요.
또한 유통기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책에 유통기한이 있습니까?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심지어 전자책은 삭지도 찢어지지도 않습니다. 결국 뒀다 보면 언젠가 그것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 또 접하지 않은 채 방치한게 몇 년이나 되었든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얻을 수 있을 때에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산다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를 하다보니 군대 시절 스케이트 보드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지금은 아이폰 메모로 쓰고 있어서 글자 수가 체크가 되지 않네요. 1000자가 넘었는지 아닌지 온전히 제 감입니다. 아마 지금 쯤 넘지 않았을까요? 글을 마칩니다.
(뻑킹 1222자네요)
2.
군시절, 나를 가장 즐겁게 해준 두가지는 뮤직비디오와 스케이트 보드였습니다. 둘 다 싸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네이트 동영상으로 보는게 전부였지만, 전역만 하면 이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뮤직비디오는 7~8년 쯤 뒤에 만들었지만, 스케이트 보드는 아직도 알리 하나 못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고 싶은 열정만큼은 남 부럽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군대에는 부러워 할 누군가가 있지 않습니다.
병장 월급을 두 달 정도 모으니깐 스케이트 보드 하나를 살 돈이 만들어졌습니다. 구매 전 정식으로 대대장에게 건의했습니다. 부대 내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게 해주십쇼! 안전을 이유로 단박에 거절당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국민의 재산이기 때문에 다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씨발 그럼 우리의 마음은요? 같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저의 선택은 그럼 몰래 타자 였습니다. 상병 달자마자 위에 아무도 없는 풀린 군번이어서 가능한 생각이었지요.
다행히 저에겐 두 개의 강력한 원 투 펀치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제가 군수 보급병이라, 커다란 창고를 10개나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이고(동원 부대여서 치장 창고가 많았습니다). 두번째는 마침 위병조장이 부족해서 병장들이 위병소 근무를 했다는 것입니다. 군에 반입되는 모든 물건은 보안 검토를 받게 되는데, 부적격으로 판단되면 반송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알게 뭡니까? 스케이트 보드가 담긴 박스를 위병소에서 직접 수령하고, 근무 복귀하러 올라가는 길에 일반 창고에 갖다 넣었습니다. 어차피 창고 안에서만 몰래 탈건데 문제 있습니까? 제 인생 몇 없는 거침 없는 시기였습니다. 군대가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뭐 얼핏 보면 그럴싸한 영웅담처럼 보이고, 토크쇼 같은데에 나가서 썰을 풀기에도 적당한 에피소드지만. 아쉽게도 군 전역 이후로 반년 정도 더 타다가 아직까지 창고에 처박혀 있습니다. 그럼 이 에피소드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뭘 무엇을 위해서야, 모든 에피소드가 목적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 목적을 제가 만들어 줄 순 있을 것 같네요.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편은 정말 딱 1000자를 확신합니다.
(1074자. 거의 다 왔네요)
3.
결국 이야기는 1편의 <가능성을 산다>와 2편의 스케이트 보드가 합쳐집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군인 월급 모아서 샀지만, 창고에 쳐박혀서 빛을 보지 못한 채 썩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낭비가 아니라는 것에 이 한 편을 투자하겠습니다.
가능성을 산다는 것의 의미는, 언젠가의 나를 응원한다는 뜻입니다. 스케이트 보드는 단적인 예시일 뿐이고, 제가 산 가능성은 넘쳐납니다. 닌텐도 스위치. 수많은 카메라와 캠코더, 특히 필름 카메라들. 와이어리스 마이크 샷건 마이크 작곡용 마스터 키보드. 아 악기 이야기 하면 끝도 없겠네요. 우쿨렐레, 기타, 피아노, 까혼, 하모니카, 리코더나 에그쉐이커 죄다 사놓고 찔끔 찔끔 하다가 쳐박아둔 것들입니다. 도저히 계속 할 생각이 안 들어 되팔거나 버린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몇 가지의 예시가 나를 증명합니다. 닌텐도 스위치 이야기를 해봅시다.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하고 싶어서 없는 살림에 비싼 돈 주고 샀습니다. 하지만 젤다 깨고 나니깐 할게 없더라구요? 한 2년 가까이 충전도 안 하고 방치했습니다. 나중엔 아에 켜지지도 않더군요. 볼 때 마다 피같은 내 돈… 그냥 빌려서 하고 돌려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장 큰 이벤트가 뭐였습니까? 말하나마나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 출시 아닙니까? 그때 제가 닌텐도 스위치가 없었으면. 아 게임 하나 때문에 이 돈은 못 쓰지, 라고 생각하고 포기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 스위치가 있음으로서, 그냥 타이틀만 사면 되는겁니다. 덕분에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케이트 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어느날 마이크 모의 영상을 보고, 다시 뽕차올라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니야 겨우 이정도 호기심으로 그 돈을 쓰기는 부담스럽지’라고 하는 대신, 당장 창고에서 보드를 꺼내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것을 원하면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한 투자라 생각하면 꽤나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이 책은 지금 당장 읽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 주도, 다음 달도, 아니 몇 년은 방치해도 됩니다. 언젠가의 내가 읽을 수 있는 가능성만 있으면 사는겁니다. 단순한 흥미였고, 시간이 지나도 이 흥미가 새로이 샘솟지 않을거란 확신이 드는 것(제 경우엔 서울까지 가서 사왔던 까혼이 그러하였습니다). 구매하다보면 그런 것들이 가려집니다. 당장의 호기심보단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투자하시오! 호기심은 금방 휘발되지만, 가능성은 휘발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위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 하나 사다보니 콘텐츠도 만들고 있고 그 계정으로 받은 광고가 수백만원이 넘어갑니다. 이 정도면 본전으로 봐도 되지 않나요? 아직 본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 본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샀으니까요.
1387자라니 나도 이제 모르겠습니다. 1000자 규칙 꼭 지켜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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