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1.
시작은 빨간색으로 이름쓰기 였습니다. 자아가 생기고 난 이후로, 뭐가 됐든 하지말라는건 꼭 하고 싶었습니다. 별 생각 없었는데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로. 혹은 해야 한다고 했단 이유로 이를 악물고 반대로 행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납득이 될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렇게 반대했겠습니까?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않아놓고 무조건 그렇게 해라 하면 될 일이겠냐구요. 아쉽게도 왼손잡이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어 실패했지만, 대부분의 일들을 반대로 하며 살아왔습니다. 가끔씩 학창시절에 썼던 연습장 뒷면을 보면, 이름만큼은 꼭 빨간색으로 써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어요.
2.
싫어하던 것 중엔 제사가 있습니다. 저는 제사를 싫어합니다. 제사 지내는 것 자체는 좋게 볼 여지가 많습니다. 어쨌거나 전통을 싫어하는건 아니니까요. 전통만큼, 납득할만한 이유가 쌓인 일이 또 없습니다. 오랜 시간 조상들이 수 많은 이유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그 역사를 알고 보존하는 것은 몹시도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전통과 역사가 실제로 행해지는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당시의 전통, 당시의 풍습이 현대 사회에 어떻게 녹여지느냐가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다른 집은 모르겠지만. 저희 큰집의 경우 제사를 혐오할 정도로 싫어했습니다. 그 고자질을 조금 해보지요.
3.
제가 대학생 때 까지는 제사를 꾸준히 다녔으니. 자아가 생긴 날들만 쳐도 족히 30번은 넘게 제사를 지냈을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30번 중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면서라도, 이게 누구의 제사이며. 그 분이 살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었고. 얼마나 보고 싶으며,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다. 이런 틀에 박힌 이야기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매번 침묵 속의 엄숙한 제사가 끝나고 나면, 큰아버지의 손가락으로 촛불 끄기 쇼와 한자가 적힌 한지를 불에 태우고, 괜히 대문 밖으로 나가 하릴없이 있다 들어가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대화는 없었습니다. 어쩌다 바둑 이야기나 고속도로 이야기, 어디 어디에 무슨 공사 새로 한다더라 같은 이야기 뿐이었죠. 저기, 방금까지 그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서 마쳤던 제사 이야기는요?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 해주시면 안돼요? 하지만 엄숙함 속에 자라난 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제사는 저에게 이 악물고 참고 버티는 시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즈음. “난 엄마 아빠 돌아가셔도 제사 안 지낼거에요”라는 충격 발언을 했었구요.
4.
그렇다고 불속성 효자인 것은 아닙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저는 가까운 누군가가 돌아가시면 그 날을 꼭 가족들이 모이는 날로 하고 싶어요. 모여서 고인의 이야기를 하는겁니다. 그럼 고인을 본 적도 없는 아이도 어떤 사람이었고, 계속해서 기억이 이어집니다. 마마 코코. 그러기 위해선 일종의 대화 화제를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죽으면 꼭 후손들에게 해야 할 투 두 리스트를 전달할 계획입니다. 뭐 그게 유서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유서와는 전혀 다릅니다. 편지의 형식으로는 감정만 전달하면 돼요. 사후 투 두 리스트는 스프레드 시트를 통해 링크값을 전달할겁니다. 장례식장은 어디로, 음식은 어떻게. 연락은 어떤 플랫폼으로, 장례식장에서 틀 음악 리스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고인이 생전 개 쩔었던 베스트 30까지. 잊혀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서(이미 죽었지만) 필요한건 다름아닌 콘텐츠가 아닐까요? 다행히 콘텐츠를 만드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유쾌한 최후를 반갑게 맞이할 계획입니다.
5.
추석이라고 다소 억지로 제사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서 반성하게 되는 마무리입니다. 추가로 제사가 싫었던 두번째 이유는 여자들 밥상이 따로 있었고, 거기엔 먹다 남은 반찬들로만 구성되었던 점 입니다. 그딴 문화를 후손에 남겨줄 생각 하지 마시고 드셨으면 곱게 일어나시오. 주간 윤동규 29주차를 마칩니다.
Part 2
1.
일단 저는 에디터 수업이라는게 뭔지는 모릅니다. 아니, 에디터라는게 뭔지도 모르겠어요. 영상쪽에선 영상 편집자를 에디터라고 합니다. 출판업계에선 글을 다듬거나 기획하는 사람을 에디터라 부르지요? 콘텐츠 쪽에선 방송 작가 포지션을 에디터로 퉁치는 것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니 에디터 수업이라는게 뭔지부터 알려주시면 좋겠지만, 어쨌거나 글쓰기 수업을 진행해도 되는 집단인건 확실해 보입니다.
2.
그런데 제가 아는 글쓰기 수업은. 아니 들어본적도 없으니, 제가 상상하는 글쓰기 수업은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행할 뿐. 정답이 있고 그것을 달성하도록 단기 속성 과의같은 수업이 아니라고 상상합니다. 고부갈등 취준생이 아니라 경찰에 안 걸리고 사람 죽이는 방법이나 시체 편하게 유기하기를 주제로 설정하더라도 그런 글이 쓰고 싶으면 쓰게끔 도와주는게 수업이 행해야 하는 방향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글을 쓰면 안돼! 라는건 누가 정하겠습니까? 윤리 시간인가요. 윤리도 정답을 정해주진 않습니다.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옳음인가요? 를 물어볼 뿐. 쉽게 말해, 주제 넘는 짓이니 안심하십시오. 그쪽에서 주제 넘게 군다면 당장 가래침을 뱉고 뛰쳐나오면 되는 것이니까요.
3.
결국 그 배우는 입장. 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해요. 선긋기는 배우는게 맞습니다. 석고 소묘를 처음 시작할 때, 수업시간 내내 선을 그었어요. 그 다음은 명암에 대해서 공부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각형 원통 원뿔 구를 그리고 난 다음에야 아그리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게 맞춤법 수업이나 언어 영역 비문학 고득점 취하기 이런거면 뭐 모르겠지만. 글쓰기에 배우는 입장이라는게 있을까 싶어요. 있다고 치더라도, 쓰고 싶은 글을 못 쓰게 할 수 있는 수업이라는게 있나 싶구요. 흔하다거나 효과적이지 못하거나, 혹은 아직 다루기 너무 어려운 주제이면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런게 좋지 않다, 라는 정도의 막연함으로 멈춘다면 아무런 성취가 없을 것입니다.
4.
일단 하고 싶은 글을 써서 개같이 말아먹어 보시지요. 그럼 그 글을 양분 삼아 다음엔 좀 덜 개같은 글을 쓰는 작전은 어떠실까요? 무슨 대회 입상 같은게 최종 목표가 아니라면. 마음 편하게 먹고, 그 클래스 사람들 신경 끄고. 선생님을 만족시켜 봐요. 이미 몇 주나 지난 사연이지만, 이번 주에 온 사연이 몇 없어서 이렇게 억지로 답해봅니다. 나 봐요. 이 사연은 재밌는 글 안 나오겠다 싶었는데도 사연 없어서 억지로 쓰다보니 개같이 조졌잖아요. 하지만 다음 번엔 이번 글을 발판 삼아, 흥미로운 사연이 안 올라오면 그냥 1부만 하고 끝내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것은 개같이 조지기 전에는 떠올리지 못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조져봐요 우리. 29주차 주간 윤동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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