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A. <평생 만족하지 못하는 대신 근사한 실력>과 B. <쉽게 만족하는 대신 초라한 실력>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난 단연코 후자다. 왜냐면 제아무리 신의 경지에 올랐어도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쓰레기를 뱉어내는 것에 불과하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내 새끼 예뻐 죽겠다 하면 뭘 뱉어내든 행복한 삶 벅찬 인생이다. 꼭 공감을 바라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인걸요. 쉽게 만족하면 근사한 실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평생 만족하지 못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자택일처럼 보이지만, 만족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근사한 실력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뻔히 보이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 않겠다 하고 선언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B가 마냥 또 쉽지만은 않아요. 근사하거나 초라한 실력은 사실 나의 만족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저처럼 대중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겐 실력이 숫자로 뜨거든요. 어제는 2만 8천의 결과를 냈고 오늘은 7200의 결과를 냈으면 실력이 점점 더 떨어지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노출이나 조회수, 도달률, 게시물 반응 등등 친절하고 세분화 된 인사이트는 가끔 B에게는 독이 됩니다(사실 인생의 대부분이 초라한 실력에겐 독이지만 어쨌든). 실력은 더 쌓을 생각이 없고. 쉽게 만족하고 싶은데 세상이 날 그렇게 두지 않는다? 그때 가장 필요한 자세가 바로 뻔뻔함이 아닌가 생각하는 지금입니다. 마치 50회로 아름다운 이별을 해놓고 돌아왔단 한마디 없이 에세이를 던져대는 주간 윤동규 처럼요.
뻔뻔함은 제가 알기론 꽤나 강력한 무기입니다. 4글자로 줄이자면 아님 말고 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3글자를 4글자로 바꾼건데 왜 줄인게 되냐면 뻔뻔하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웃음기 뺀 멍청한 얼굴로 외쳐보세요. 아님 말고! 중요한건 아니라서 말되, 말아버리기만 하면 안 됩니다. 아님 말고, 다른거 또 하지 뭐. 이거 아니야? 이거 별로야? 이거 안 통해? 아님 말고, 그럼 이거 해볼게. 이 에세이가 처음엔 반말로 시작한걸 아시나요? 하다보니까 존댓말로 바뀌었습니다. 저의 에세이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퇴고를 하지 않거든요. 아주 가끔 힘 줘서 쓰는 글은 퇴고합니다만, 그때도 ‘어라 반말이었는데 존댓말로 바꼈네 하하’하고 넘어가는 편입니다. 한번은 그래도 좀 고쳐보려 했는데 글의 맛이 완전히 달라져요. 다 된 라면이 짜다고 물을 부어버리면 정량으로 끓인 라면 되는거 아니잖습니까. 그땐 그냥 짜게 먹는게 답입니다. 좀 짜죠? 아님 말고
중요한건 <아님 말고> 이후에 따라오는 <이건 어때?>입니다. 이건 어때가 없으면 아님 말고는 그냥 회피형 인간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1000개의 말고 뒤에 1001개의 어때가 있기 때문에 B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걸 추진력이라 부르겠어요. 쉽게 만족하는 대신 쉽게 질리고. 쉽게 포기하는 대신 쉽게 시작합니다. 주간 윤동규는 쉽게 그만뒀지만 쉽게 다시 시작합니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드디어 펜을 들었습니다 이런거 아니에요. 어제 밤에 아 맞다 그러고보니 나 다시 주간 윤동규 하고 싶은데?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인 오늘 20분 정도 투자해서 이 글을 썼습니다. 윤동주에게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면 윤동규에겐 쉽게 씌어진 에세이가 있다. 쉬운 이유나 글의 무게감은 차원이 다르지만 적어도 윤동주 윤동규 이름은 비슷하잖아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에세이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이 마냥 부끄럽지만은 않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만나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