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윤동규 31주차

부먹 찍먹 어게인

2023.10.14 | 조회 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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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윤동규

한 주간 쌓인 쓰레기들을 공유합니다

Part 1


1.
어찌보면 작년에 한참 찍어 올렸던 <아가리 대작전>의 글버전이 주간 윤동규가 아닐까. 저는 그거 좋았어요, 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1분 내로 이야기해야 하다보니 글보다 함축적이고 효과적이고. 무엇보다 보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나치게 뚱뚱해진 지금,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조심스럽네요. 아무리 제가 돼지라도 돼지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뭔가 카메라 앞에 서는건 곧 헤이터들에게 공격할 거리를 주는 느낌이에요. 당장 살이 안 쪘다고 해도 잘 생긴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레이션만 있는 콘텐츠에서도 목소리나 발음 가지고 욕을 먹는걸요. 

2.
그러니 글이 좋습니다, 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제가 쓴 글을 읽고 욕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글을 “읽고”욕하다보니, 사건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지 몰라도 사건 자체는 이해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영상으로 된 콘텐츠는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았다가 거슬리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트집 잡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구요. 애초에 저는 누군가가 불편해 하는 이야기 주제를 좋아합니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잘 다루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이에요. 이미 누구나 넘치게 했던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습니다. 당연한 듯이 그건 그런거야, 하고 정해진 이야기들이 과연 그게 그런걸까? 하는 자리가 즐겁습니다. 답이 그건 그런게 맞아, 라고 정해지고 제가 멍청한 놈이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게 그런거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니까요. 배움이 즐거운걸지도 모르겠네요.

3.
이렇게 글이라는 매체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하는 저이지만. 그래도 화자의 얼굴이 나오는 힘에 대해서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이야기는 이야기 그 자체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이슈가 되기도 하니까요. 저도 가능하면 외모를 가꾸고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제 버피테스트 3세트 반복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리는걸 보면 조금 우선순위가 뒤에 있지 않을까요. 다시 한번 <아가리 대작전>을 사랑해주셨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키로만 더 감량하고 나면 토크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4.
사실 여기까지는 서론 같은거였고. 그래서 왜 <아가리 대작전>이야기를 꺼냈냐면, 제가 한번 탕수육 부먹 찍먹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짧은 영상 안에 그 내용을 쏟아 부으려다 보니 제 씅에 안 차서 목구멍에 걸린 가시마냥 자꾸만 신경이 쓰였단 말이죠. 물론 3~40분 떠들어 댈 수도 있지만, 부먹이 싫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볼 사람은 없을거고. 그렇다면 글로라도 써봐야겠다. 혹시 <나는 부먹이 싫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면 읽어주실건가요? 안 읽으실거 아니까 여기다가 씁니다. 바로 이어갈게요, 부먹과 찍먹. 그것은 마치 취향의 차이인 것 처럼 교묘하게 우매한 자들을 속이는 폭력에 대한 이슈입니다. 그것은 마치 가스라이팅과도 같아서, 폭력을 당하는 쪽은 물론이고 폭력을 행하는 쪽도 그게 폭력인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기 쉽게 설명드릴게요. “그걸 왜 부어 미친놈아”는 흔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탕수육 소스를 붓는 장면과 그 옆에서 경악하며 말리는 사람. 마치 엊그제 본 짤처럼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반대를 생각해보면 너무 쉬워요. “그걸 왜 찍어 미친놈아”라며 탕수육을 찍는 장면과 옆에서 말리는 사람은 떠올릴 수 있습니까? 쉽지 않죠? 왜냐면 찍는 것은 부먹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와보시죠. “제 친구가 탕수육을 찍는 바람에 기분이 잡쳤어요”라고 하는 사람 말이에요. 그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찍어 먹더라도, 언제든지 부어 먹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아 찍었잖아 망했네 이제 못 붓잖아. 그런 상황은 없어요. 하지만 그 반대는 늘 존재하지요? 이미 부어 버리면 찍을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어요. 이 시점에서 발생하는 것이 폭력입니다. 탕수육 소스에 들어간 영양분을 섭취해야 할 편식 심한 아동과 그 부모 정도의 관계라도 되지 않는 한,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에요. 취향의 폭력이지요. 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너는 이 형태로 먹어야 한다. 이게 과연 음식이 아닌 그 어떤 것이었어도 이런 상황이 인정이 된다고 보십니까? 이 옷이 예쁘니까 이렇게 입어, 라고 생각해보세요. 그 옷을 입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 찍먹의 아주 최소한의 논리입니다. 아니요, 저는 탕수육 소스를 입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탕수육은 근본부터 부어서 나오는 음식이야”. 나는 근본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싶은겁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당신이 돈을 냈다고 해서 내 취향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사준 옷이라고 해서 입어야 합니까? 당신이 사준 휴대폰이라 해서 들고 다녀야 합니까? 당신이 준 돈이라고 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사야 합니까? 그런거면 다시 들고 가세요. 그깟 몇만원에 내 영혼까지 팔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두번 다시 저와 식사를 할 생각 하지 마세요. 니 말 잘 따르는 골빈 놈들 데려다가 쳐먹거나, 탕수육은 역시 부어 먹는거지 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식사하면 됩니다. 그것은 제가 찍어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라는 이유로 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제가 부어 먹는 것이 좋다고 한들, 저에게 물어보지 않고 붓는 것은 결국 똑같은 폭력입니다. 제가 맞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대뜸 패도 되는 것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맞아서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결과론적인 끼워맞추기에 불과합니다. 서에 가서 어디 한번 잘 이야기 해보세요. 탕수육은 부먹도 찍먹도 아니고 쳐먹이다? 이게 제일 악질입니다. 자신의 취향에 대한 고집이나 존중 따윈 개나 줘버리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기나 해.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당신이 짐승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어떤 존엄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 혹은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붓든 찍든 탕수육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테니, 짧게 다른 예시를 들어보지요. “물어보지 않고 파인애플 피자를 산 사람”과 “물어보지 않고 민트 초코를 퍼 온 사람”은 근본적으로 부먹과 같습니다. 파인애플 피자를 먹고 싶지 않은 사람, 민트 초코를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은 취향을 말소당한 것입니다. 그리 중요한건 아니지만, 저는 부먹을 제외하고 파인애플 피자나 민트 초코는 좋아하는 쪽입니다. 없어서 못 먹죠.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취향의 종류의 문제는 아닙니다. 상대방의 취향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가 예민한건 맞아요, 예민하지 않다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제가 예민한 대상이 폭력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우스개소리로 하하호호 붓고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이상 부먹 찍먹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주간 윤동규 31주차를 마칩니다. 

5.
https://www.instagram.com/reel/Ck2qrYzjRUE/?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id=MzRlODBiNWFlZA==

해당 내용에 대한 에피소드는 콘텐츠에서 이어서 즐기실 수 있습니다

 

Part 2


최근에 좀 멀어진 친구가 있는데요, 이유 없이 단톡방을 나갔고 그뒤로 연락이 끊겼어요.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어려운 일이 있었던 걸 이야기 해주지 않아서 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 친구와 멀어진 시기와 맞물려서 가정에서 좀 크게 어려운 일이 있었거든요. 친구에게 이야기 하기도 좀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도 연락을 좀 자제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었어요. 친구가 연락을 해도 다음에 보자고 했고, 이유를 물어봤을 때 내 상황이 정리되면 이야기 해준다고 말 했구요. 근데 그걸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야', '더는 친구하기 싫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요? 잘 이해가 안되요. 말 안하겠다고 한것도 아니고, 정리가 되면 이야기 해주겠다고 한건데요. 아무리 친하더라도 가정에서 일어난 큰 사건을 사사건건 이야기하긴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참 곤란하네요. 멀어진 이유를 저한테 이야기한 것도 아니라 타인에게 들었기 때문에 먼저 연락하기도 좀 어렵고 애매하네요.. 20대를 같이 보낸 사람에게 더는 소중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참 속상한 일이예요.


1.
짝사랑은 연인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오가는 모든 관계. 친구나 직장 동료, 가족에게도 있어요. 사랑 받고 싶어하는 딸과 아들만 사랑하는 엄마, 뭐 이런거 흔하게 있잖아요. 그 마음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결국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관계도 있고, 수지타산을 계산하며 정리해야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추측컨대, 선생님의 친구분은 그러한 이유로 선생님을 정리한게 아닐까 합니다.

2.
이런 때엔 연인 사이를 놓고 생각하면 쉽고 편합니다. 밥을 쩝쩝거리면서 먹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연인이 쩝쩝거리는 것을 참고 참고 참다가, ‘아 이 사람이랑 평생 같이 밥을 먹을 자신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이별을 한다면. 그 이유를 꼭 말해주진 않을겁니다. 어차피 고쳐지지도 않을 것이고, 자신이 예민하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거에요. 그러면 억울하겠지요. 아니 왜? 우리가 왜 헤어져? 하지만 세상 모든 이별은 단 한가지의 이유 뿐입니다. 헤어질 이유를 이겨낼 정도로 사랑하지 않아서. 

3.
친구분에게 “쩝쩝거리지 않고 밥먹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친구에게는 털어놓기”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게 옳고 그르고, 그 사람이 어떻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결정을 내린 후 잖아요? 고작 그런 이유로? 라고 괴로워 하실 필요가 없어요. 선생님은 죄송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정리가 된 친구인거에요. 그것에 비참하다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손해입니다. 왜냐면 그 친구 입장에선 고작 그런 이유가,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르니까요. 그것은 오해가 아닐거에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린을 건드린 것이고, 그 역린이 아무리 쫌생이 같고 이해 안 되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건드린 것은 선생님입니다. 

4.
그리하여, 지금 선생님이 할 수 있는 행동은. 1번, 그냥 마냥 슬퍼하기. 2번, 그새끼 존나 이상해 하며 뒷담화 하기. 3번은 나랑 가치관이 달라서 멀어졌지만 좋은 친구였어 하고 좋은 추억으로 묻어두기 입니다. 연인이라면 4번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마음을 돌려보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겪어본 친구라는 관계는 누군가의 돌아선 마음을 돌리면서까지 이어가다가는 꼭 탈이 나더라구요. 지금의 상처를 한번 더 겪을 찬스를 마련하는 것 뿐입니다. 선생님은 친구에게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다음에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고. 그 친구는 다음에도 또 상처를 받을거에요. 그런 살얼음 판 같은 관계는 정리하는게 서로에게 좋지 않나요? 애초에 친구라는게 그렇게까지 필요한지 잘 모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하네요. 대화가 왜 하고 싶어? 주간 윤동규 31주차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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