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부터 글밥을 먹고 살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글을 잘 쓰지도 못하고,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막연한 작가에 대한 동경인가요? 그렇다고 하기엔 이영도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도 모르는 나이부터 꿈꿔왔는데요… 단지 웅상 도서관에 가면 기분이 좋았고, 책 냄새가 나쁘지 않았고, 깨비 책방에서 도라에몽을 빌려 보는게 즐거워서 그랬을까요? 그렇다면 만화가를 꿈꿨겠죠. 만화가의 꿈은 정확히 중2때 때려치웠습니다. 남들이 중2병이 오는 그 시기, 저는 조금 현실적인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재밌게도, 레터링을 기반으로 한 그래피티를 했다거나. 타이포 디자인을 배우거나, 3D 모델링. 애니메이션. 촬영 구성안 편집 구성안이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거나. 어찌보면 글이랑 전혀 상관 없어 보이기도 하는 뮤직비디오. 아이돌 브이로그. 물건 소개나 대중문화 소개, 육아 계정까지. 일단 글을 쓰는 삶을 살아가기 전에 기반을 마련하고 싶은걸까요? 그렇다면 좀 더 돈이 되는 일을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얼마 전, 새벽 내내 우는 딸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캠핑장 근처를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한 3바퀴 돌고 나서 살펴보니 눈이 초롱초롱 하더라구요. 포기하고, 음성 녹음을 켰습니다. 그러고보니 음성 녹음용 줄 이어폰이 있으면 좋겠네요. 에어팟은 절망적이니까요. 어쨌든
오늘의 에세이는 원래 그때 녹음한 분량을 받아쓰기해서 보내려고 했습니다. 제법 괜찮은 내용이었거든요. 와! 나 오늘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하루다, 라고 느껴질 정도였어요. 역시 입으로 뱉어야 생각이 완성이 된다. 그런데 생각은 완성됐을지 몰라도 글은 형편없더라구요. 넌 형편없었어! 그래서 글을 가다듬고 가다듬고 하다가… 아 그냥 같은 내용으로 새로 써야겠다. 이건 뭐 한강 라면 끓이고 뒤늦게 쌈장 넣어가며 염도 맞추는 기분입니다. 어차피 면을 조졌거든요.
결론은 <꼭 글이 아니어도 된다>였습니다. 그런데 왜 글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냥 어린 마음(15세)에 글 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몇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장소가 어디든 상관 없는 일이어야 할 것. 그래야 뭐 어디 프랑스 파리에서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정년퇴직이 없어야 할 것. 기업이나 클라이언트가 있는게 아닌 대중과 직접적으로 거래하는 일이어야 할 것.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으로 대체 될 수 없는 일이어야 할 것. 뭐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은 살아가며 덧붙인 조건입니다. 처음엔 아마 장소 밖에 없었을겁니다. 프랑스에서 살고 싶었거든요. 쟝 피에르 쥬네랑 아멜리 쁠랑 덕분에요. 그때 상상한 글은 형태도 없었습니다. 뭐 산문일지 소설일지 시나리오일지, 뭐가 됐든 글이면 된다. 작가면 된다. 아마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으니까 그 쪽이 아니었을까요? 어린 시절의 미래 일기를 훔쳐 보는 기분이네요. 물론 고등학생 때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그때는 글 쓰려면 여기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를 지원하고, 아 평생 공부 안 한 사람은 대학교를 못 가는구나! 생각하고 입시 미술로 빠졌지만. 그 전까지는 글쓰기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너무 쓸데없는 얘기가 많죠? 어차피 어디 쓸 데는 없을겁니다. 요즘 점점 제 산문들이 독자보단 작가를 위한 글이 되어가는 기분이에요. 존댓말을 의식적으로 하는 이유도 뭔가 너무 개인적인 글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끼는데, 말투 좀 바꾼다고 달라지진 않더라구요. 여러분 말 예쁘게 하려 하지 말고 예쁜 말을 하세요. 어쨌든(어쨌든, 이란 말을 꽤 많이 하는 기분입니다. 좀 자제해야겠어요) 위에 나열한 모든 조건이 꼭 글이 아니어도 된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럼 뭐, 말이야? 아니죠 말은 사람이 출연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경써야 할게 많습니다. 당장 카메라나 하다 못해 마이크가 필요하고. 편집을 해야 하고. 말이 나갈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책에 말을 실을 순 없어요. 그리고 책 만큼 간편하게 생각을 담을 수 있는 매체가 없어요. 그림? 그림 안에 글이 들어갑니다. 영상도 마찬가지에요. 굳이 말하자면 원래는 글만 있어도 되는 것들이 글로는 예쁨 받지 못해서 억지로 다른 요소를 끼워 넣은 기분입니다. 감자 튀김 맛집을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도 감자 튀김만 먹으러 오지 않아서 케밥이나 햄버거를 파는거죠. 아무도 감자 튀김 가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게 본체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조금 소름이 돋는건, 글도 사실 감자 튀김이 아니었다는거에요. 아니지 글은 좀 많이 봐줘서, 감자 튀김인거에요. 그런데 난 감자를 맛있게 팔고 싶어요. 감자를 잘 튀기는 사람이고 싶은게 아니라, 감자를 파는 사람이요! 그렇다면 저는 무슨 가게를 하는 사람인가요? 글이 감자 튀김이면, 감자는 무엇인가요? 좀만 더 생각해보세요. 이미 정답이 나왔어요.
네 정답은 <생각>입니다. 전 생각을 잘 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생각이 섹시하거나 생각이 뛰어나거나 생각이 근사한 사람이요. 생각이 재밌는 사람이요. 어차피 생각 자체를 팔 수는 없습니다.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구현되어야 해요. 그러니 글을 떠올렸고, 영상을 만들고. 만화도 그렸죠. 생각이라는 나의 코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건 어떤 형태로든 재조립 할 수 있는거에요. 글은 재료가 아니라 요리였고, 엄연히 튀기는 실력이 필요해요. 가장 베이스가 되는건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 가치를 더하는 세상이 점점 늘어나고 있죠. 네 예상하셨겠지만, AI의 등장입니다.
뭐 재미 없는 얘기니까 대충 넘어갑시다. 생각을 독특하게 잘 하는 사람은 AI라는 기술을 만나 날라다닐겁니다. 이거에 이견 있는 사람 잘 없을거에요. 그럼 뭐 제가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도 될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건 생각을 잘 하는 사람은 남의 생각을 구현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현하는 사람들도 대체 불가능한 포지션을 취하지만, 그렇게 되면 15세 윤동규가 나열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조각 할 수 있는 조각가가 된다 하더라도. 조각품을 만드는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 하니까요. 이 쪽은 오직 키보드와 메모장만 있으면 반지의 제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바람과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그럼 배는 미친놈아. 조상님이 대신 태워주니?
그 와중에 이런 생각도 들겁니다. 그럼 다른 개쩌는 생각들이랑 어떻게 싸울거냐. 니 생각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너는 왜 경남 양산시에 쳐박혀 있다가 서울 은평구에서 빌빌대고 있지? 그렇습니다, 생각으로 먹고 살고 싶지만 생각이 압도적으로 뛰어나진 않습니다. 암만 좋게 봐도 나쁘지 않은 정도에요. 다행인점은, 나쁘지 않은걸 끊임 없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왜 가끔 그런 친구들 있잖아요. “어떻게 그딴 생각을 그렇게 쉬지도 않고 하니?”. 쉴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하면서 쉬는거니까요. 망상은 나의 힘. 처음엔 망상을 하면서 심신을 달래주니까 힘이 됐다면, 지금은 말 그대로 섹시한 생각이 곧 힘입니다. 진득하고 강렬한 생각 하나 할 시간에, 대충 떠오르는 그럴싸한 생각 80개 하겠습니다. 이 중에 니 취향인 생각 하나 정도는 있겠지. 대충 그려지지 않습니까? 미래 사회의 글쓰기의 모습. 뇌에 뇌파를 어쩌고 AI가 어쩌고 이건 예술이다 아니다 어쩌고… 알게 뭐겠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이몬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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