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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복스럽게 먹는 사람이 싫다
복스럽게 먹는 사람이 싫다, 는 제목은 사실 어그로고 꼬집어 얘기하자면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 먹는 행위에 여러 잡소리를 동반하는 사람이 싫다.
둘은 분명 다른 거니까.
근데 사실 난 복스럽게 먹는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나이가 30대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와 저 사람 참 복스럽게 잘 먹는구나!’하는 감상을 한 번은 느껴봄직한데 단 한번도 그런 감상을 가져본 적이 없다.
복스럽게 먹는다는 게 도대체 뭘까.
누군가는 복스럽게 먹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을만큼, 복스럽게 먹는다는 건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라는 건데.
망할 나는 단 한번도 타인의 음식물 섭취를 보면서 흐뭇했던 적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잘 먹는 걸 보면 좋지 않나?
아 물론 좋다, 좋지요.
내 지인, 내 가족이 맛있게 먹으면 당연히 나도 좋다.
헌데 그건 상대방이 현재 먹는 행위에서 행복함을 얻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지, 먹는 모습, 즉 시각적은 만족감은 음…
내게 있어 ‘상대방이 어떻게 먹는다.’라는 문장에서 어떻게에 들어갔던 표현들을 꼽자면.
-쩝쩝거리며, 시끄럽게, 정신없이, 사운드가 비질 않고.
-조용히, 얌전히, 깔끔하게.
위는 부정적 표현들이고 아래는 무난무난 긍정적인 표현들인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게 있어 타인의 먹는 모습이란 짜증나거나, 아무렇지도 않거나 두 가지라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여기에 복스럽게 먹는다, 라는 감상을 한 가지 더 추가하면 되고.
먹방이 유행한지도 참 오래다.
그러니 내가 어땠겠는가.
당췌 왜 유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이 이들이 좋아하고 심지어 찾아본다는 건 그럴만한 공통분모가 있다는 소린데 나는 모르겠다고.
그래서 꽤 여러번 ‘나는 왜 모를까 그걸? 남들 다 좋아하는데.’라고 생각했었는데, 근래에 와서 어떤 영상 하나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나 혼자 삶 프로그램에서 코드쿤모씨가 나와서 자장면을 먹는 영상이었는데, 그가 자장면을 어떻게 먹었게.
입에 소량의 면만 넣고 나머지 면빨은 중간에서 이로 똑 잘라먹었다.
그 영상을 함께 보던 박모씨가 옆에서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아이구 저걸!”
후루룩 후루룩 면치기를 해줘야 하는데 똑 잘라먹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듬뿍 담긴 탄성이었다.
다들 박모씨처럼 그 장면이 아쉬웠나요?
저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히려 뭐랄까, 힐링이었다.
입안에 과하게 음식을 넣지 않아 보기 좋았고 면치기는 보통 소리를 동반하는데 똑 잘라주니 조용해서 또 좋았다.
왜 코드쿤모씨는 음악도 잘하고 음식도 보기 좋게 먹지? 칭찬해.
그 이후 나는 나 혼자 삶에서 소식좌들만 모아놓은 영상을 보았는데 그게 다시 힐링이었다.
다들 음식을 권해도 먹질 않고, 먹어도 위를 적시는 정도로만 먹으니.
대식가 먹방을 보며 같이 느꼈던 더부룩함 따윈 없이 편안했다.
생각해보니 효모씨네 민박에서 아모씨가 밥을 먹던 모습은 보기가 좋았었지…
그래, 나는 남이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입맛 없이 먹는 걸 더 좋아해!
깨닫고 나니 의문이 사라져 편안하다.
🌎_자전
여전히
내 속을 덜어내서 뭔가를 보여준다는 건 힘든 일이다. 십 몇 년 전에 군대간 친구에게 동정조의 위문편지를 보내줄 때도 생각했는데, 글을 쓰고 나면 한바닥 가득 쏟아져있는 나의 애처로운 잔상을 제 3자의 시선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 힘들고 창피하다. 게다가 주제 선정과 얼개 짜기에도 쓸데없이 기합을 들이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간 코로나19 확진자 동거가족의 격리생활이나 냉면 얘기,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그룹의 앨범에서 엿보이는 세계의 일관성, 그간 써온 몇 안되는 향수들의 역사 등이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일단 시작과 끝의 논지가 하나로 모여야지 잡담을 마구 쓰다가 결론에서 그러던지 말던지 뭐~ 가 되어버리면, 그건 좀 허무하지. 그러다보면 짜내는 과정에서 자연히 나타나게 되는 고뇌는 카펫 아래로 쓰레기를 숨기듯 숨기고 싶어진다. 거기에는 상품성이 없으니까. 최대한 기분 좋은 부분만 뽑아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어진다. 애초 이곳에 참여 제안을 받았을 때의 내용도 ‘아무 글이나 괜찮다’였지만 역시 뭔가를 싣게 된 이상 누군지 모를 독자에게 조금의 흥미라도 끌고 싶다고, 읽고서 남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런 몸부림은 지난 호에서 충분히 엿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글 또한 몇차례 읽으면서 나는 알게되었다. 이곳의 기능은 우리끼리 서로에게 마음의 생존신고를 보내고, 확인하고, 그 전송의 루틴을 확립하는 것 또한 포함한다는 걸. 어찌됐든 나도 독자니까! 내가 그런 걸 얻었으면 그런 의의가 있는 거잖아!
지난 한 주간 나는 집 근처 놀이터에 매화가 핀 것을 보았고, 다시 찾아가 어딘지 매콤한 매화 향기를 맡았다. 겨우내 만나지 못했던 동네 개를 다시 마주쳐서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했으며 옷감이 좋은 구제 옷을 인터넷에서 사다 용기를 내어 동네 수선집에 맡겨서 촌스러운 어깨뽕과 모피 트리밍이 된 깃을 떼어냈다. 가족에게서 코로나가 옮을까봐 화장실에 있던 칫솔을 다 내 책상 옆으로 옮기고 수건도 수저도 따로 쓰고 씻을 때마다 락스 희석한 물로 화장실 안 거의 모든 것을 닦은 뒤 마스크를 벗고 씼었다. 환자가 거슬려서 부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밥도 하루 한끼를 겨우 먹는 생활을 했다. 내가 남에게 전염시킬 게 무서웠기 때문에 바깥에서 취식도 전혀 하지 않고 가끔 포장만 해왔다. 즉, 거의 방안에서만 지냈다. 바깥에 나갈 때마다 똑바로 서서 앞으로 걸어나가는 감각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칩거와 격리생활 탓에 책상 주변이 집기로 엉망이 되었고 그런 실내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벽걸이 수납함을 설계하고 재료인 캔버스 천을 주문했다. 선거 전후로 친구들과 과격한 말들을 나누었다. 보험료를 냈다. 휴.
살았다.
💃🏻🐆_창문이 흔들리는 날
창밖에 폭풍이 고여있다. 고인 폭풍 속에서 옆집 옥상에 적재된 철판이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철판이 서로 부딪히고 마찰하며 불안감을 조성한다. 저 철판이 우리집으로 날아오면 어쩌지, 저 철판이 누군가를 때리면 어쩌지, 저 철판이 나를 때리면 어쩌지. 나와 가족과 나의 우리를 걱정한다. 그리고 매일 주기적으로 게임 이벤트 마냥 숨이 턱 막히는 소식이 들리는 나날이다. 지금은 말을 줄이고 늘 새삼스러운 충격에 대비하려고 한다. 건강해야지.
✒ 이달의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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