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이에게

새삼스러운 기쁨

2025.07.04 | 조회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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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다 가는 길은 지루하니까, 약간 어긋난 박자로 걷습니다.

안녕, 제이.

 

오늘은 새로운 둥지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며칠 전, 드디어 작업실을 구했거든. 설명을 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지금은 작업실이 필요한 상황이었어.

 

운 좋게도 딱 한 자리가 남은 공유 오피스에 들어오게 됐어. 2인실인데 나 혼자서 쓰고 있어서, 그 기쁨이 꽤 커.

 

한쪽 자리는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다른 한쪽은 휴식을 위한 자리로 꾸며봤어. 이곳에서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글을 쓸까? 기대가 돼.

 

제이는 어때? 요즘 날씨, 덥고 습하잖아. 기분은 괜찮아?

 

며칠 전, 나는 주말농장에서 감자를 수확했어. 그동안 샐러리는 몇 번 땄지만, ‘수확했다는 느낌은 딱히 없었거든.

그런데 감자는 정말 다르더라. 뿌리를 뽑는 순간, 감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삽으로 흙을 파내니 숨어 있던 감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어.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어.

놓친 감자가 있을까 봐 땅을 샅샅이 뒤졌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더라. 바구니 가득 감자를 담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너무 기뻤어.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농약도 안 줬고, 비료도 안 뿌렸고. 물도 제때 못 줬는데.

감자들이 알알이 잘 여문 게 너무 대견하고, 또 새삼스럽게 기뻤어. 거저 얻은 선물처럼 느껴졌달까?

주말마다 가서 잡초뽑고, 가지치기했던 그 수고가 전부 눈 녹듯 사라졌지.

 

집에 와서 흙 묻은 감자를 씻었어. 하나하나 모양이 전부 달랐지.

어떤 건 마트에서 파는 감자처럼 동글동글하고 큼직했지만, 어떤 건 조랭이떡만 했고, 어떤 건 벌레가 절반이나 파먹었더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마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감자들은, 실은 누군가가 예쁘게 골라 선별한 감자들이었구나.

그리고 그 제멋대로인 감자들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마트에 진열된 감자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고, 매끈하고, 동그랗지.

하지만 실제 밭에서는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어딘가는 흠집이 있고, 벌레 자국도 있어.

그래도 모두 자기 모양대로, 그 자리에서 잘 자란 감자들이잖아.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마트에 진열된 감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별과 포장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선반 아래, 땅 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제각각의 모양으로 자라나는 감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모습을 가진 감자들이야.

어떤 사람은 통통하고 동글할 거고, 어떤 사람은 작고 뾰족할지도 몰라. 누군가는 상처나 흠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감자. 그렇지?

 

지난 편지에서 그대로 두는 것에 대해 이야기 했잖아. 이번에는 그 반대의 경험을 한 것 같아. 때로는 정말 애쓸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결실이 얼마나 기쁘고 달콤한지도 말이야.

 

제이. 네가 어떤 모양이든, 어떤 모습이든,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

우리가 흙 속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자라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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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가을에는 고구마를 수확할 예정이야. 고구마들도 벌써부터 기대돼.

 

Offbeat에서 초보 농부, 애나 씀

 

이 편지는 애나가 제이에게 쓰는 레터입니다. 제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당신의 가명 애나: 글쓴이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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