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7일, 흥미로운 책이 나왔습니다.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철학의 개념과 번역을 살피다”, 제목부터 뭔가 도발적인데요, 아니나다를까 지난 몇 년 간 인터넷 상에서 ‘철학 구몬’ 열풍을 이끈 신우승 씨의 책입니다. 빠르게 만나보시죠!
오랜만에 북리뷰로 인사하네요. 김오늘입니다🙋🏻♂️ 나온지 한 달이 채 안 된 신간, 바로 들고 왔습니다. 메멘토 출판사 ‘나의 독법’ 시리즈 두번째 책,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철학의 개념과 번역을 살피다》입니다. 부제에서 잘 드러나듯, 책에서는 뭔가 어색하거나 잘 와닿지 않는 철학 개념어의 번역 관행들 중 몇몇을 짚으며, (교양 철학의 제고를 위해) 철학 번역이 가야 할 길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총 세 명의 저자가 함께 합니다. 책에서는 “공동 저자”라고 합니다만, 저는 편의상 저자들을 ‘주저자’와 ‘논평자’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저자로는 이미 우리에게 ‘전기가오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신우승 씨가 나섭니다. 책의 구성을 이야기하며 다시 언급하겠지만, 신우승씨는 각 장의 주제들에 대한 발제자의 역할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두 명의 논평자, 김은정 씨와 이승택 씨가 함께합니다. 논평자들은 주저자의 제안을 비평하고, 때로는 새로운 제안을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제 눈에 띄었던 것은 논평자의 구성입니다. 한 명은 독일 철학 전통, 다른 한 명은 미국 철학 전통에 기대어 있는 연구자인데요, 자신이 속한 전통에 따라 번역어의 선호가 많이 갈리는 우리 철학계입니다. 양쪽의 날개를 갖고, 더 넓게, 사안에 관해 이야기하리라는 신뢰가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책의 구성
주저자와 논평자가 각각 있다는 것은 책의 구성이 토론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지요? 맞습니다! 책의 각 장에서는 해당 장의 주제인 철학 개념들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주저자의 개념에 관한 개관이 있고, 이에 기초해, 그리고 나름의 논변을 통해, 먼저 주저자는 자신이 염두에 두는 번역 지침을 제안합니다.
바로 이어서 두 명의 논평자들의 응답이 있습니다. 종종 반론 없이 동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반론으로 응하는데요, 논평 또한 매우 치밀하고, 논증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자는 주저자의 발문과 논평자의 논평문을 각각 읽으며 자신의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합부입니다. 종합부에서는 다시 주저자가 등장하며 논평자들의 반론을 수용하거나, 논평자들의 반론에 나름의 재반박을 줍니다. 때로는 최초의 제안 자체를 포기하거나 논평자의 제안을 받아 최종 제안을 내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경우는 최초의 제안을 옹호하며 크게 바뀌지 않은 한에서의 번역 지침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구성입니다. 마치 정기 간행물 지면에서의 토론을 연달아 보는 느낌인데요, 더구나 구어체로 쓰여 있다 보니, 읽는 것만으로 저자들의 토론장 한 가운데에 들어온 기분이어서 몰입감이 더해집니다.
책 속으로
이렇게 구성된 토론은 총 열 네 번 이루어집니다. 항목이 아주 방대하지는 않지만 그 주제 분야나 단어의 성격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논리학,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전반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지고요, “significant form”같은 아주 세부적인 표현에서부터 “metaphysics”같은 학제의 이름 자체에까지 칼을 대고 있습니다. 아주 다양한 분야의 저작을 번역하고, 폭넓은 주제의 철학 교육을 진행해 온 경험이 있는 저자들이기에 비로소 시도할 수 있던 목차 구성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제게는 열 네 번의 토론이 모두 흥미로웠습니다. 저자의 모든 제안이 설득력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어떤 데에는 수긍할 만했고 어떤 데에는 동의를 하기 어려웠습니다만, 그럼에도 몇몇 대목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비판 없이 수용하던 번역 방식이 이런 문제를 갖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어서 뜻깊은 독서였네요.
(저자들이 어떤 번역 지침을 제안했는지는, 책 또는 위의 영상을 통해 확인해 주세요!👋🏻)
그런데 이 책의 백미는 사실 ‘마치며’와 ‘부록’에 있습니다. ‘마치며’에서 저자는 한국어로 철학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언어로 된 철학적 표현들을 우리 말로 옮기기 위해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사항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름의 희망이 되는 메시지들도 있고요, 학계와 출판계에 대한 날선 비판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이든 마음에 새길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또 ‘부록’에서는, 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자잘한 번역에 관한 제안들을 싣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물론 부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점들이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또 하나의 본론’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중요하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맺는말
학계의 번역 관행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철학에 대해 근 20년 간 이런 책이 한 권이라도 있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때로 지면을 통해 번역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진 적은 있었다지만 주목받은 것들은 다소간 소모적이게 느껴졌고요. (아무래도 학술논문에 실린 토론이 교양 독자 차원에서 주목을 받긴 어려우니까요.) 그런 와중에 이처럼 신사적이고, 세련된, 번역에 관한 토론이 서가에 등장했다는 것이 아주 반가운 소식입니다.
책을 아주 면밀히 살펴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의도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얇은 책이고요, 책에서의 결론을 요약해 읽는 것보다, 그 결론에 나아가는 과정의 고찰과 논증을 살피는 것에서 더욱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철학 전공자시라면 자기 반성과 쉼(?)을 위해, 비전공자라면 ‘남의 동네 구경’(?)과, 어쩌면, 철학 입문의 보조서로 사용할 수도 있을 책이고요.
번역과 출판, 교육으로 힘써 온 저자(들)이 어떤 힘을 갈고 닦아 왔는지 잘 느껴졌습니다. 이 저자들로부터뿐 아니라 많은 목소리를 통해 유사한 토론과 제안들이 더 많이 나오길 바라며, 저자 및 출판사께 감사와 응원을 전합니다.
도서 정보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신우승・김은정・이승택 저.
메멘토, 2022년.
정가 13,000원.
이어서 읽을 만한 책
‘한국어로 철학 개념 말하기’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그 다음으로는 ‘한국인의, 한국에서의 철학’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이지요! 《한국현대철학: 그 주제적 지형도》는 주제와 시대를 넘나들며 한국에서, 또는 한국인을 통해 발전한 철학적 담론들을 치밀하게 살핍니다. 어떻게 단 한 명의 저자가 이렇게나 넓고, 또 깊게 살폈나 싶을 정도로, 저자 정대현 교수님의 명민함과 노력이 빛나는 책이기도 합니다. ‘(현대) 한국에도 철학자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실 때라면 당장 집어 읽으시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립니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