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수많은 철학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지만, 이 모든 흐름을 쫓아가기엔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지난 두 주 사이 오늘의 철학이 공부한 철학 논문들 중 소개할 만한 논문들을 정리해 보내드립니다. 에디터 김오늘이 전합니다.
2026년에 들어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추석입니다. 아마도 지금 보내드리는 것이 9월 마지막 뉴스레터가 되겠네요. 10월부터 오늘의 철학의 내부 운영에 약간의 변화가 생길 예정입니다. 이에 맞추어 내년부터 새로운 콘텐츠 포맷을 시도해 보려고 하는데요, 월말 즈음 공지를 통해 따로 안내드리겠습니다.
9월 넷째주의 〈논문 큐레이션〉은 개인과 기업, 정부의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대 사회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요즘 영어 기반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는 에아나시르 점토판(tablet of Ea-nāṣir)에 적힌 에아나시르의 만행(?)과 관련된 수메르 밈이 인기인 것 같습니다. 에아나시르는 구리를 주로 다루는 상인이었던 듯한데, 질 낮은 구리를 보내거나 구리를 아예 안 보내고 먹튀(!)를 저지르는 만행으로 여러 항의 편지를 받아 모아둔 것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는, 부도덕한 경영 행태가 그 옛날에도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기 행각들의 근본 책임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에아나시르라는 개인의 양심이 문제이며 따라서 에아나시르를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든 ‘더 쉽게’ 버는 길에 혹하는 경향이 있고 현재의 제도적 장치들이 그런 지름길 내지는 일종의 백도어를 차단하지 못한다면, 꼼수의 여지를 남겨둔 사회 또한 책임을 진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는 환경 문제, 특히 인공지능 개발에 소모되는 전력이나 자재 소모 문제와 결부되어 이 주제가 등장하고 있기도 하지요. 이럴 때 기업은 참여자이니 보다 상위에 있는 정책 입안자나 기타 감독 기관이 감독자로서 역할해야 할 텐데요, 하지만 국가 역시, ‘어디까지 방지를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기업을 규제한다고 할 때의 불만도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부동산 시장에서 이런 볼멘소리가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마땅한 방안이라고 생각이 들어 큰 맘 먹고 투자를 했는데 국가가 나서서 시장을 안정화하겠다고 하니 화가 난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만큼이나 용기 있게 내 재산을 투자했는데, 그에 마땅한 보상을 얻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은 불공정하다! — 대략 이런 것이 부동산 및 증권 시장 규제 도입 반대파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오늘 가져온 세 편의 논문은 이런 문제들에 관한 다소 낯선 관점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에아나시르의 만행에는 사회의 책임이 있고, 인공지능 개발이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면 인공지능 개발에 앞뒤 안 보고 투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며, 투자자들이 기업의 이윤을 배당받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거든요. 한 편씩 살펴봅시다.
확장된 심성을 넘어 확장된 자율성으로
The political turn of the extended mind: rethinking autonomy beyond individualism in a technological world (N. Crozatier, Synthese)
철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구성하는 범위를 점점 키우고 있습니다. 시작은 우리의 언어적 능력이 각자의 두뇌뿐 아니라 자연물과 사회 공동체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인, 힐러리 퍼트남의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 Putnam 1975), 타일러 버지의 “개인주의 그리고 정신”(Individualism and the mental, Burge 1979)으로 대표되는 외재주의 의미론이 길을 열었습니다. 이어 앤디 클라크와 데이비드 챠머스의 공저, 《확장된 심성》(The Extended Mind)은 일기장, 계산기, 컴퓨터 따위의 도구들이 우리의 심성의 확장된 부분으로 볼 수 있다는, 심성 전반에 관한 외재주의를 확산시켰고요.
저자는 이러한 외재주의적 관점을 이어나갈 때, 우리의 자율성 또한 외재적 성격을 갖게 됨을 지적합니다. AI 챗봇을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심성 외재주의에 따를 때, AI 챗봇을 사용하는 사람은 AI 챗봇을 통해 자신의 추론 및 탐색 능력을 확장합니다. 그런데 AI 챗봇의 사실과 다른 답으로 인해, 가령 가족에게 치명적인 약물을 잘못 먹여 가족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해 보죠. 이 경우 현재의 책임은 사용자에게 돌아갑니다. ‘AI는 실수할 수 있다’라는 면책 조항이 이를 위한 것이죠. 하지만 사용자의 행동 자체가 확장된 인지적 기관(AI)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면 그 행위의 책임을 오로지 사용자의 것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대략적인 논지로 보입니다.
아쉬운 부분은 어딘가 연결고리가 비어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우리가 공범을 모두 처벌하는 것은 각자가 모종의 판단에 따라 특정한 물리적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I 챗봇을 비롯한 인지적 도구들이 그러한 공범적 지위를 갖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가장 유사한 경우는 변호사의 착오 있는 법률 자문에 의해 고객이 제3자에게 불법행위를 저지르게 된 상황일 텐데, 이 경우 변호사는 해당 제3자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다만 고객에게 전문가로서 주의를 다하지 못한 데에 따른 책임만을 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불법행위 주체의 책임이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별도의 책임들이 발생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책임에 대한 통상의 직관을 따를 인지적 도구 또는 그 운영 주체에게 책임이 분산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대강 훑어보아서는 저자가 이에 대한 답을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박은 ‘확률빨’로만 비합리적인 것일까?
Continuity, catastrophic risk, and severe uncertainty (J. Roussos & H. Stefánsson, Philosophical Studies)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 중에는 ‘모 아니면 도’인 것들이 많습니다. 죽음을 감수하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나, 특정 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내리는 공동체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겠습니다. 이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의사 결정 이론(decision theory)에서는 통상 기댓값 최대화 원리를 사용합니다. 선택지들 중 가장 기댓값이 큰 것으로 의사를 결정해라. 우리가 경제 시간에 배운 그 원리이지요.
그런데 저자들에 따르면, 의사 결정 이론에서 통상 받아들여지는 논제로 ‘연속성 원리’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특정 선택지에 따른 셋 이상의 가능한 경우가 있어서, x가 가장 나쁜 경우, z가 가장 좋은 경우, y는 그 사이즈음 되는 경우라고 합시다. 이때, x의 확률이 p이고 z의 확률이 (1-p)라면 x와 z만을 가능한 경우로 갖는 도박의 기댓값과 y의 효용이 동일해지는 p가 존재한다는 것이 연속성 원리입니다. 갑자기 수학이 나와 복잡해 보입니다만, 쉽게 말해 ‘모 아니면 도’인 도박을 공평하게 만드는 확률 분포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 아니면 도’ 이야기를 한 김에 윷놀이로 예를 들어 봅시다. 설명을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 모가 나오면 한 번 더 던질 수 있는 규칙은 제외하고 말하겠습니다. 진출하는 칸 수를 효용이라고 하자면, 도(= 1)가 가장 나쁘고 모(= 5)가 가장 좋습니다. 그 중간의 아무 경우, 가령 개(=2)의 경우를 생각해 보죠. 1×p+5×(1-p) = 2인 p가 존재한다면 이는 연속성의 사례가 됩니다. 방정식을 풀어보면 그 해가 p = 3/4 = 0.75가 됨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개’가 확실하게 나오는 선택지는 75% 확률로 도, 25% 확률로 모가 나오는 선택지와 비등비등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지구 멸망 버튼’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버튼을 누르면, 특정 확률로 지구가 멸망합니다. 멸망하지 않을 경우 이 세상은 슬픔도 비극도 없는 천국 같은 곳이 되고요. 지구 멸망과 지구의 천국화 사이에는 ‘그냥 이대로 살기’가 있을 테니, 연속성 논제에 따를 경우 지구 멸망의 확률이 특정 값보다 낮기만 하다면 이 버튼을 누르는 것이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그 버튼을 누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냥 사는 것과 이 버튼을 누르는 도박을 감행하는 것은 전혀 달라 보여서요.
저자들은 이때의 머뭇거림을 확률값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찾습니다.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일 경우, 우리가 이 선택지의 결과들이 어떤 확률 분포를 갖는지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기댓값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흥미로운 설명이고, 실제로도 도박에서의 심리를 인식적 가능성과 연관짓는 관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찜찜함은 있습니다. 저는 확률 분포가 너무나 확실하다 하더라도 버튼을 안 누를 것 같아서요.
투자자들이 돈을 버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당한가?
Does capitalist risk-taking justify profits? (S. Hansson, Synthese)
마지막 논문입니다. 요즘 투자 많이들 하시죠? 투자는 합법적이고, 주식회사 제도는 투자를 아주 정교하게 상품화한, 현대 시장 경제의 역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소위 ‘영끌’로 투자를 해서 돈 다 잃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풍경도 요즘 자주 보입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더 뭔가 손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주식 투자를 했으니 이 정도인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친구들과 연대보증을 서서 어떤 회사를 세웠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경우, 회사가 막대한 채무를 지고 도산했다면 나는 말 그대로 회사가 진 채무만큼을 채무로 넘겨받습니다. 이 큰 리스크를 투자자들에게 지게 할 유인이 없으니, 제도가 정교해지며 오늘날의 법인 제도를 완성시킨 것이겠고요.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이른바 ‘기업가 정신’을 자본가들이 이윤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정당화에 대곤 합니다. 저 기업가는 과감히 자신의 돈을 털어 이 사업을 열었고, 그러니 그의 사업 성공에 따른 마땅한 몫을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창업이나 투자는 도박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게 되는 것이죠. 특정 확률로 성공을, 특정 확률로 실패를 낳는 게임에 베팅해 성공을 결과로 얻어, 이에 상응하는 몫을 회수하는 것이니까요. 여기에 대해 저자는 묻습니다. 과연 기업의 소유자들이 기업이 창출한 부가가치의 일부 혹은 전부를 가져가는 것이 옳은가?
질문만을 보았을 때 예상되는 논지는 ‘위험 감수는 이윤을 정당화하지 못한다’여야 할 것 같은데, 이 문제에 관해 짧게 논하는 절이 있지만 저자는 이 주장을 강하게 밀고 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논점을 씹어 먹는(biting the bullet) 태도에 가깝습니다. 말인즉, 법인 제도, 특히 유한책임회사 제도, 또한 특히 주식회사 제도는 투자자들의 위험을 상당히 줄이는 쪽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도산한다고 해도 삼성전자 주주들이 연대채무를 지지는 않으니, 맞는 말 갖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책임 감수를 통한 정당화를 하느냐? 저자가 보건대, 실제로는 돈 많은 사람들이 돈 놓고 돈 먹기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안전한 낚시터 같은 것을 만들고자 ‘책임 감수’라는 레토릭을 구사한다는 것인데요. 고개를 끄덕이게 되다가도 갸웃하게 되는, 알쏭달쏭한 면이 있는 관점입니다.
어느새 추석 연휴도 다 가고 월요일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주중에 운영에서의 변화들을 공지드린 뒤, 10월 7일 수요일, 《이달의 철학》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9월 마무리 잘 하시고 2026년 마지막 분기도 든든히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김오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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