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프롤로그
새벽 다섯 시, 서울 청담동 에르메스 매장 앞입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 시부터 기다렸고, 어떤 사람은 전날 밤부터 자리를 지켰습니다.
매장이 문을 열면 그들은 달립니다. 0.1초가 중요합니다. 누가 먼저 가방을 손에 쥐는가.
사람들은 이것을 '오픈런’이라고 부릅니다. 열리자마자(open) 달린다(run)는 뜻입니다.
‘런(run)’. 달리기. 왜 달려야 할까요? 무엇을 향해, 혹은 무엇으로부터 달리는 걸까요?
그리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달리지 않을 수는 없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평생의 달리기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렸고, 마라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했습니다.
달리기는 그에게 삶의 방식이었고, 글쓰기의 토대였습니다.
하지만 피쥐마니테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달리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죠.
어쩌면 오픈런 앞에 선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달리기 시합을 상상해봅니다. 어느 봄날 오후, 학교 운동장이나 공원 트랙 같은 곳입니다.
출발선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누군가 총을 들어 올립니다. “땅!” 총소리가 울리고,
모두가 달립니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꼭 달려야 하나요?
어떻게 하면 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달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첫 번째 방법은 신체가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거나, 너무 피곤해서 발이 떨어지지 않거나, 심장이 "더 이상은 안 돼"라고
신호를 보내는 경우입니다. 의학에서는 이것을 번아웃이라 부릅니다.
신체의 생물학적 한계가 의지를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오픈런을 반복하는 리셀러들의 89%가 번아웃을 경험한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체가 우리보다 먼저 진실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야"라고 말하는 용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무릎이 아팠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렸습니다.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게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멈추는 것도 옳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규칙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출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하거나, 경기 도중 트랙을 벗어나거나,
신발을 벗어던지는 방법입니다. 이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달리고 있는데
혼자 멈춰 서는 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습니다.
게임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게임을 떠나는 게 합리적입니다.
세 번째는 대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달리기보다 수영이 좋다거나, 상금보다 저기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게 더 좋다고
깨닫는 순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가치의 재배치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의 순서가 바뀌는 겁니다. 피쥐마니테는 종종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 달리기를 원했던 걸까요, 아니면 모두가 달리니까 따라 달린 걸까요?
대안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발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네 번째는 욕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1등을 해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 같아”, "이미 충분해"라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이 끝없이 다음 대상으로 미끄러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늘 다음 것을 원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이 가방, 저 차, 그 직장.
하지만 만족은 그 회로를 끊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가 만족을 금지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연기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것을 사면 행복할 거야"라는 환상 말입니다.
하지만 만족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달릴 이유를 잃습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가졌어.”
다섯 번째는 시스템을 간파하는 것입니다.
이 경기가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닌가, 심판이 특정 선수의 편이 아닌가,
규칙이 공정하지 않은 게 아닌가 의심하는 순간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공정한 경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구조라고 분석했습니다.
미셸 푸코는 권력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조를 보게 되면 달리는 게 무의미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1Q84》에서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억압한다"고 썼습니다.
시스템이 억압만 한다면 우리는 달려야 할 이유를 잃습니다.
여섯 번째는 함께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안 뛰면 어떻게 될까?” 사회학에서는 이것을 집단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혼자는 약하지만 함께는 강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너무 개인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픈런의 구조는 리셀러들을 경쟁자로 만들어 연대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역사는 함께 멈춰 선 사람들이 세상을 바꿨다고 말합니다.
일곱 번째는 무관심입니다.
총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아, 오늘 경기 있었어?"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애초에 그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욕망의 회로 밖에 있다고 표현합니다.
광고가 닿지 않는 사람, 유행에 관심 없는 사람. 가장 쉬운 방법이자 가장 어려운 방법입니다.
이미 회로 안에 들어온 사람은 밖으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여덟 번째는 철학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이 쓴 소설에 바틀비라는 필경사가 나옵니다.
상사가 "이 서류 좀 복사해주게"라고 하면 바틀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유도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그냥 안 합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바틀비의 거부를 "잠재성의 보존"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냥 안 하는 편을 택할 뿐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것만큼 강력한 거부는 없습니다.
아홉 번째는 놀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뒤로 걷기를 해보거나, 심판에게 손을 흔들거나, 누가 가장 늦게 도착하나 내기를 하는 겁니다.
미국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진지한 규범을 패러디하는 것이 때로 전복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지한 것을 진지하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달리기가 경쟁이 아니라 놀이가 되는 순간,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달리기를 조롱하면서 즐깁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열 번째는 극단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입니다.
출발선에서 한참 동안 서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다 지나간 뒤에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겁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현대 사회는 속도가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빠른 사람이 이기는 세상입니다. 오픈런의 0.1초 경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느리게 간다는 것은 그 지배를 거부하는 겁니다.
"느린 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속도를 거부하는 건 때로 정치적 행위입니다.
열한 번째는 무의식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발이 안 떨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히고,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의식이 "해야 해"라고 말할 때 무의식이 "안 돼"라고 저항한다고 말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신체화된 저항이라고 부릅니다. 신체는 우리의 의식보다 현명합니다.
억압된 것은 언젠가 돌아옵니다. 신체의 형태로.
열두 번째는 존재론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달리는 사람이 아니야”, “이건 내 게임이 아니야”, "나는 이런 식으로 살지 않아"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할 자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너는 달려야 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니, 나는 달리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차원에서 거부하는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면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달리기가 자신을 작가로 만들었다고 믿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것이 그의 진실이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달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멈춰 서서, 걸으면서, 혹은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말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둘 다 옳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달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열두 가지보다 훨씬 많고,
당신만의 방법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새벽 다섯 시 에르메스 앞에서, 혹은 당신이 서 있는 어떤 출발선에서,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달리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달리셨나요?
뭐, 아무렴 다 괜찮습니다. 어쩌면 달리지 않기와 달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둘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봄날 오후, 트랙 위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합니다.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멈춰 섭니다.
모두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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