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5] 🌻 1년 전 이맘때 듣던 노래를 기억하나요?

시월의 마지막 목요일에 편지를 부치는 숑🌻입니다. 한 주도 잘 지내셨나요? 언제부터 이렇게 가을 날씨가 들쑥날쑥 알쏭달쏭했나 싶은 요즘입니다. 한낮에는 등허리가 뜨끈한데 늦은 시간 귀갓길은 한겨울처럼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이른바 길거리에 패딩과 반팔이 공존하는 계절입니다. 구독자님, 아무쪼록 부지런한 레이어드 룩으로 체온을 지키며 건강한 나날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제가 쓰는 지니뮤직 어플에는 '타임머신', '내가듣던' 기능이 있어요. 선택된 연/월에 내가 많이 들은 곡을 목록으로 쭈르륵 보여주는데, 잊고 있다 한번씩 눌러보면 보물이라도 캔 듯 새삼 신기한 마음이 됩니다. '아~ 이런 노래가 있었지! 왜 그동안 잊고 지냈을까?' 싶어 재생하면 그 시기의 온도와 인상적인 장면들이 뇌리에 쏟아져 들어오고요.

이번 레터에서는 지난 해 가을, 저의 타임머신 머리 칸을 당당하게 차지하던 노래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물론 매해의 가을이 고유한 온기를 가지지만 지나간 가을마다 진한 존재감을 뽐냈더라고요. 언제나처럼 즐겁게 듣고 읽으시며 구독자님의 작년 이맘때를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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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극장 - 언젠가 내가 늙어서

작년 가을, 일주일의 긴 휴가를 떠났다. 멀리멀리 떠나간 섬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우연히 이 밴드를 알게 되었고, 입김이 나오도록 시린 날씨가 올 때까지 주구장창 들었다. 밴드에 대해 찾아보다 2008년 데뷔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나름대로 인디밴드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에는 내가 열광할 대상이 고요하고 납작하게 잔뜩 숨어 있구나. 매사를 궁금해 하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늙어서>는 밴드 제8극장이 2013년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양화대교]의 수록곡이다. 첫 마디부터 솔직한 목소리가 참 좋았다. 나는 이런 가사도 참 좋아한다. 표면적이지 않고, 나름으로 고민한 삶의 철학을 주섬주섬 꺼내놓고, 마치 삶에 할 말이 있어서 음악을 만든 것 같은 사람들. '언젠가 내가 늙어서 조용한 날이 오면 네게 전화하겠네 / 늙는 건 두렵지 않다고 다만, 한번쯤은 후회했는지 너 역시 그랬었는지'

이 노래를 연신 반복해서 듣던 작년 가을 이맘쯤, 좋아하는 친구들과 춘천의 산 중턱 숙소에서 모였다. 해가 지면 양 팔을 쓸게 될 만큼 서늘하지만 적당히 달아오른 취기로 무마되는, 딱 요즘 같은 가을 밤의 온도. 친구들과 이 노래에서 전화하고 싶어하는 '네'가 누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보다 앞서 늙어 간 타인일까? 아니면 평생 젊으리라 단언했던 어린 날의 나일까? 이런 궁금증을 앞다퉈 나눌 친구들과 함께 듣는다면 더욱 좋을 노래라고 생각한다.

🌻 이태원 - 솔개

이 노래는 재작년 가을에 가장 많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2년 전 가을에도 일주일의 가을방학을 보냈고 그 시기 나는 아주 지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솔개>라는 옛 노래의 첫 소절부터 눈물이 삐죽 나올 만큼 공감했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 날으는 솔개처럼 (...)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

지쳐있던 무렵 자주 주문처럼 되뇌던 말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 걸까? 방안의 가구처럼 나를 혼자 내버려두면 좋겠다.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았으면. 메신저 알림, 전화 벨소리, 그놈의 알람 알람 알람, 그 어떤 소리도 제발 나를 찾지 말았으면! 휴가가 시작될 무렵엔 노랫말을 곱씹느라 상념에 잠겼는데, 근심을 훌훌 털고 돌아올 무렵엔 그저 경쾌한 멜로디가 즐겁게 느껴졌다.

내가 이해한 노랫말 속 솔개는 수많은 관계 속에 나 자신을 잃기 전, 그러니까 되찾고 싶은 나의 진짜 모습을 의미했다. 지쳐버린 부리에 이따금 신선한 공기를 쏘여주다 보면 내 안의 솔개가 더 넓은 창공을 훨훨 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94년 김광석이 행복한 웃음을 곁들여 부르는 버전이 있어 함께 소개하고 싶다. 수많은 농담과 진실 속에 나의 솔개가 멀어졌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가사에 집중하며 들어보길 추천하고 싶다.

🌻 정밀아 - 어른

새로운 음악에 감응 받는 빈도가 점차 줄어든다고 느낀다. 과거에는 2주에 한번쯤 전에 없던 음악에 마음을 내어주고 오만 호들갑을 떨었다면, 요즘은 그런 경험이 두 달에 한번만 찾아와도 반갑고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정밀아의 [청파소나타] 앨범 전체는 작년 늦은 가을의 큰 수확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뮤직바의 스피커에서 정밀아의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긁던 순간의 전율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른>은 지방에서 상경한 딸내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타이틀곡 <서울역에서 출발>과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곡이다. 눈 코 뜰 새 없는 일상을 해치우듯 보내다 올려다본 도시 풍경은 휘황하면서도 쓸쓸해 보이곤 했다. 딱 내 마음처럼 가까워 보이다가도 이 도시는 아마 내가 영원히 공감할 수 없는 타지로 느껴졌다. 이러나 저러나 다른 곳으로 떠날 용기는 내지 못하는 내 발등을 가만히 내려다보게 하는 노래였다.

정밀아의 [청파소나타]는 2021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 알게 된 아티스트의 존재가 이토록 묵직하고 켜켜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세상 어딘가엔 이렇게 우직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몫을 묵묵히 걸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의 노랫말처럼 '마음이 이리저리 구르는 밤'마다 그의 노래를 위안 삼았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어느 시기에 알맞게 떨어지는 이름표를 찾은 느낌이란 아무려면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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