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20] 🌻 잔디밭에 드러누워 들으면 이곳이 페스티벌!

한 주도 잘 지내셨나요? 숑🌻입니다. 날씨가 정말 재밌는 요즘입니다. 찌는 듯한 여름이 다 갔구나 싶다가도 방심하고 나섰던 산책길에 등땀을 흠뻑 쏟고, 얇게 입은 어떤 귀갓길에는 서늘한 밤바람에 팔을 쓸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땀방울이 송송 솟는 와중에도 공기 중에 분명 가을이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이러다 금세 외투를 걸쳐야 할 날씨가 올지 모르니 지금의 들쑥날쑥한 날씨를 그 자체로 즐겨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말, 저는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린 렛츠락 페스티벌에 다녀왔어요. 예년보다 이르게 개최되어 한낮엔 땀이 제법 났지만 그늘만 들어가도 상쾌한 가을 바람이 불더라고요.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벌렁 누우니까 머리 위로는 청명한 하늘, 저 멀리선 둥둥거리는 음악 소리, 웃고 떠드는 목소리들... 한여름의 페스티벌이 생존게임(?)이라면 가을의 페스티벌은 이런 맛이었지, 실감했습니다.

이번 주 레터에는 가을날 페스티벌에서 보고 들은 아티스트의 음악으로 모아봤습니다. 저는 계절이 넘어가는 봄가을에 유독 한국 밴드의 음악을 즐겨 듣는 것 같아요. 오늘 소개하는 세 팀의 공통점이라면 데뷔 15년이 넘어가는 경력 그리고 모두 네 글자 밴드명을 가졌다는 점인데요. 그만큼 친근하게 느끼실 분들이 많으리라 예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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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퍼톤스 - 21세기의 어떤 날

9월 첫째 주의 렛츠락은 여름의 페스티벌 버금가게 더웠다. 입장 줄을 기다리는 데만 땀을 한 바가지 쏟고, 논알콜 맥주를 들이부으며(페스티벌에 논-알콜이라니!) 오후 1~2시엔 돗자리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 나를 끝내 무대 앞으로 일으킨 순서가 바로 페퍼톤스였다. 그들의 음악을 청량한 이웃처럼 그렇게 자주 들어왔으면서 공연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페퍼톤스의 무대는 과연 관록이 넘쳤다. 안전과 건강이 최고라며 중간중간 꼭 물 챙겨 마시라는 우려가 멘트의 절반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수준 높은 페퍼톤스 팬들..'처럼 센스 넘치는 깃발 문구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서도 <21세기의 어떤 날>은 2012년 발매한 4집의 수록곡인데, '공연 전용 곡이 아닐까?' 싶을 만큼 흥이 넘쳤다. 땀으로 반짝이는 팔을 번쩍 들고 사람들에 뒤섞여 '우리 지금 바로 여기!'를 외치던 순간이 벌써 전생처럼 아련하다. 언젠가 추억할 수 있는 '21세기의 어떤 날'이 하루 더 생긴 셈이다.

🌻 국카스텐 - 거울

사실 이번 렛츠락을 예매한 결정적 이유는 국카스텐이었다. 드디어 하현우의 고음을 라이브로 영접하게 된다니! 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 시작된 국카스텐의 무대는 헤드라이너의 포스로 넘실댔다. 곧 발매된다는 3집 소개 외에는 별다른 멘트도 없이 몇 곡을 내리 달리더니 너덜너덜 지친 관객들에게 '이제부터 놀 준비됐냐'고 외치는데 기함했다. 아니 지금까지 하신 건 뭔데요...!? 그러다 앵콜 곡으로 라젠카를 질러버리는 초인적 힘이라니.

<거울>은 국카스텐의 데뷔 앨범에 실린 타이틀 곡이다. 밴드 이름의 유래가 중국식 만화경이란 뜻이라는데, 만화경을 통해 들여다본 사이키델릭한 영상의 느낌과 노래가 꼭 닮아 있다. 이 노래에 떼창하는 상상을 과장 없이 십 년쯤 한 것 같은데 드디어 소원 성취했다. 차력쇼처럼 쉴새없이 뽑아내는 하현우의 미학적인 고음, 기분을 몽롱하게 하는 기묘한 기타 리프 떼창, 다 때려 부수는 드럼 사운드까지! 당분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날의 무아지경이 세트처럼 함께 떠오를 것이다.

🌻 노브레인 - 한밤의 뮤직

토요일 라인업의 끄트머리는 누가 기획했는지 매우 본격적이었다. 무려 크라잉넛-노브레인-국카스텐 순서였던 것이다. 공연마다 아티스트들은 모든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내는데 무대 사이 쉬는 시간이 20분밖에 안 돼서 이날을 위해 체력을 키워오길 잘했다고 느꼈다. 역시 락페는 청춘이고 체력이다!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는 이 더위와 열기에 새빨간 정장을 위아래로 갖춰 입고 나오는 광기를 보여줬다(물론 후반부에 상의를 훌떡 벗긴 함). 잔뜩 거칠거칠한 그의 목소리는 마치 로파이(Lo-fi) 음악의 인간화 같다고 해야 할까. 독보적인 록밴드 보컬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렛츠락에서도 봤지만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넌 내게 반했어>부터 <비와 당신>까지 목놓아 떼창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충분한 무대였다.

그 중에서도 <한밤의 뮤직>은 노브레인에게 이런 노래가 있었나 싶을 만큼 귀에 쏙 들어왔다. 찾아보니 2007년에 발매한 앨범 수록곡으로, 앨범 제목부터가 [그것이 젊음]이었다! 예쁜 분홍색으로 뉘엿뉘엿 노을이 저물어 갈 무렵 들려온 <한밤의 뮤직>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낭만 그 자체였다. 물러가는 여름을 단단히 붙잡고 남은 힘을 짜내서 언제까지라도 방방 뛰고 싶어지는 음악. 이번 여름을 기억할 '한밤의 뮤직'이 한 곡 추가되어 더없이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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