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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브톡 스핀오프 5화] 고구마의 착각

2020년 5월의 어느 날

2024.06.04 | 조회 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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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브톡

일하는 조직과 개인의 경험을 나눕니다

2020년 5월 8일 어버이날, 불효 같은 퇴사를 했어요. 코로나가 막 발병하고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기, 마흔 훌쩍 넘은 자식이 이직처를 구하지도 않은 퇴사였죠. 계획은 있었습니다. 서너 달 정도만 일본의 시골마을에서 어학연수를 빙자한 휴식, 40대 미혼 여성의 대기업 퇴사기란 당시의 먹힐 법한 주제로 유튜브를 찍어 보자 같은. ^^;;;

그렇게 좀 쉬고 하반기쯤 초기 스타트업에 가야지라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일본 입국 거절(그땐 일본이 나름 감염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시기)로 붕 떠버렸지만.

퇴사 하겠다는 건 이미 여러 차례 운을 띄워두었기에 언젠가는 하려나 보다 하셨지만 그렇게 빨리, 예고 없이 저지르기부터 할 거란 생각은 못하셨어요. 심지어 어버이날 퇴사하고 5월 말까지 집에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굴지의 대기업을 퇴사하고 이직처 없이 듣도 보도 못한 스타트업 어딘가에 가겠다고 한 데다 나이나 시기 상 식구들의 걱정이 많은 거야 당연하겠죠. 그러나 그게 우려되어 숨긴 건 아니구요. 어차피 말릴 수도 없다는 걸 잘 아시기에 뭐라 하시지는 못하면서도 속으로 걱정하실 게 뻔해 그 신경 쓰기 싫단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어요. 한 달 정도만 아무 생각 없이 책도 많이 보고 이것저것 공부도 하고 싶었거든요. 

권고사직으로 실직한 가장들이 집에 말 못해 양복차림에 구두 신고 등산을 간다던데, 상황은 좀 다르지만 저도 7시 반이면 집을 나서 카페로 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 남들 출근하는 시간 텅텅 빈 카페에서 넉넉한 자리 차지하던 그 시간이 얼마나 꿀 같았는지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급여와 퇴직금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에 울컥함과 만감이 교차하며 기도(?) 같은 자기 세뇌를 했던 때입니다.


나의 실제 역량과 무관하게 정작 다니는 동안에는 간과하는 때론 별 거 없다 폄하도 해가며 사실 딱히 대단할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OO이라는 후광이 준 적당한 편리함과 적당한 풍족함과 적당한 자부심을 누리며 살아왔는데. 준비 없이, 계획 없이 이를 박차고 나온 지금 나란 사람 자체로도 행복할 수 있기를....

대기업이란 후광아닌 후광을 알게 모르게 누리고 살며 회사가 나인냥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내가 아닌 뭔가를 나인 줄 알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4년이 지나고 이때보다 더 고독한 홀로서기를 한 지 9개월이 되어 갑니다. 어느 기업이라는 후광을 떼고 극초기의 스타트업에 합류할 때보다 더 제 이름 석자만 달랑 걸고 고군분투 중이에요. 그나마 나은 거라면 고구마인 줄 아는 고구마로 자기 인식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정도랄까요. 

팀이 없고 어딘가 뒷배가 되어 줄 조직이 없다는 건 여러 모로 아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 혼자 뭔가를 다 알아서 배우고 해내야 한다는 거, 동료가 아닌 모르는 누군가와 일을 하며 척하면 척이 되지 않는 거, 한 두 달 쯤 슬럼프 좀 온다 해도 따박따박 꽂히는 급여 따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거, 힘들지 혹은 괜찮아라며 날 도와주고 기다려줄 동료나 리더가 없다는 거 같은 부분요. 

지나고 보면 당시엔 불만도 짜증도 많았던 모든 상황이 다 고맙고 든든했단 생각을 합니다. 

오늘만큼은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도 새삼 주변 동료와 조직을 조금은 관대한 눈으로 달리 봐보면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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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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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한나

    1
    4 months 전

    안녕하세요 지난 3개월이 조금 안되는 시간 새로운 직장에서 나름 고군분투하느라 프로브톡도 제대로 못읽었어요. 그럴 시간이 없었을리가….. 그저 마음의 여유가 한 조각도 없었습니다. 수습기간 3개월은 나도 회사를 평가하는 기간이라고 믿고 떨치고 나온 요즘입니다. 지금 지난 프로브톡을 따라잡고 있는데 또 많은 시도를 하고 계시네요. 언제나 수연님의 글을 읽으면 마치 내 자신이 쓴 글을 읽는 것 같을 정도로 공감이 가요. 항상 응원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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