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8일 어버이날, 불효 같은 퇴사를 했어요. 코로나가 막 발병하고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기, 마흔 훌쩍 넘은 자식이 이직처를 구하지도 않은 퇴사였죠. 계획은 있었습니다. 서너 달 정도만 일본의 시골마을에서 어학연수를 빙자한 휴식, 40대 미혼 여성의 대기업 퇴사기란 당시의 먹힐 법한 주제로 유튜브를 찍어 보자 같은. ^^;;;
그렇게 좀 쉬고 하반기쯤 초기 스타트업에 가야지라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일본 입국 거절(그땐 일본이 나름 감염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시기)로 붕 떠버렸지만.
퇴사 하겠다는 건 이미 여러 차례 운을 띄워두었기에 언젠가는 하려나 보다 하셨지만 그렇게 빨리, 예고 없이 저지르기부터 할 거란 생각은 못하셨어요. 심지어 어버이날 퇴사하고 5월 말까지 집에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굴지의 대기업을 퇴사하고 이직처 없이 듣도 보도 못한 스타트업 어딘가에 가겠다고 한 데다 나이나 시기 상 식구들의 걱정이 많은 거야 당연하겠죠. 그러나 그게 우려되어 숨긴 건 아니구요. 어차피 말릴 수도 없다는 걸 잘 아시기에 뭐라 하시지는 못하면서도 속으로 걱정하실 게 뻔해 그 신경 쓰기 싫단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어요. 한 달 정도만 아무 생각 없이 책도 많이 보고 이것저것 공부도 하고 싶었거든요.
권고사직으로 실직한 가장들이 집에 말 못해 양복차림에 구두 신고 등산을 간다던데, 상황은 좀 다르지만 저도 7시 반이면 집을 나서 카페로 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 남들 출근하는 시간 텅텅 빈 카페에서 넉넉한 자리 차지하던 그 시간이 얼마나 꿀 같았는지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급여와 퇴직금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에 울컥함과 만감이 교차하며 기도(?) 같은 자기 세뇌를 했던 때입니다.
대기업이란 후광아닌 후광을 알게 모르게 누리고 살며 회사가 나인냥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내가 아닌 뭔가를 나인 줄 알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4년이 지나고 이때보다 더 고독한 홀로서기를 한 지 9개월이 되어 갑니다. 어느 기업이라는 후광을 떼고 극초기의 스타트업에 합류할 때보다 더 제 이름 석자만 달랑 걸고 고군분투 중이에요. 그나마 나은 거라면 고구마인 줄 아는 고구마로 자기 인식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다는 정도랄까요.
팀이 없고 어딘가 뒷배가 되어 줄 조직이 없다는 건 여러 모로 아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 혼자 뭔가를 다 알아서 배우고 해내야 한다는 거, 동료가 아닌 모르는 누군가와 일을 하며 척하면 척이 되지 않는 거, 한 두 달 쯤 슬럼프 좀 온다 해도 따박따박 꽂히는 급여 따윈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거, 힘들지 혹은 괜찮아라며 날 도와주고 기다려줄 동료나 리더가 없다는 거 같은 부분요.
지나고 보면 당시엔 불만도 짜증도 많았던 모든 상황이 다 고맙고 든든했단 생각을 합니다.
오늘만큼은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도 새삼 주변 동료와 조직을 조금은 관대한 눈으로 달리 봐보면 어떠실까요?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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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나
안녕하세요 지난 3개월이 조금 안되는 시간 새로운 직장에서 나름 고군분투하느라 프로브톡도 제대로 못읽었어요. 그럴 시간이 없었을리가….. 그저 마음의 여유가 한 조각도 없었습니다. 수습기간 3개월은 나도 회사를 평가하는 기간이라고 믿고 떨치고 나온 요즘입니다. 지금 지난 프로브톡을 따라잡고 있는데 또 많은 시도를 하고 계시네요. 언제나 수연님의 글을 읽으면 마치 내 자신이 쓴 글을 읽는 것 같을 정도로 공감이 가요. 항상 응원합니다.!!
프로브톡
꺄~ 오랜만이에요 한나님. 이직 하셨군요 새로운 시작 축하드려요. 정신 없어도 갓 이직할 때가 가장 설레는 때이기도 하더라구요! 잘 해내실 거라 믿고 응원합니다. 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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