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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의 기쁨』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스테이시는 길바닥에서 통하는 감쪽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랬듯이 주변에서 보고 자라면서 스스로 만들어 써야 했던 가면이자(누구도 그 가면을 쓴 채로 태어나진 않으니까), 이제는 굳이 벗지도 않겠지만 벗을 수도 없는 가면이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쓰고 살아서 아예 거죽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 눈에 자나 깨나 보이는 것은 운동선수와 래퍼의 이미지뿐이었다. 다른 형태의 부, 곧 지성인의 삶에 매진하는 흑인 따위는 생전 본 적도 없다 보니, 그런 삶을 두고 호사니 뭐니 하기 전에 애초에 가능하다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려고, 책 속으로 난 길을 걸으려고 분투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나조차 그런 삶을 쟁취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직관적으로도 수입차나 금목걸이보다 시간, 독립, 자유 같은 개념이 더 값비싸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독서나 사유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불끈 솟는 한편으로 겸손해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절대 손목에 내걸 수 없는 종류의 성공이었다. 지적 노동의 열매가 아무리 달콤하다고 한들 흑인 동네에서는 큼지막한 휠을 단 레인지로버처럼 ‘뻐길’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더는 흑인 동네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가 아니라도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어디엔가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인간은 자유를 택하느니 무엇이 됐든 다른 것을 택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증거를 내 주변 곳곳에서, 스테이시와 앤트에게서, 물론 나에게서도 목격했다. 우리는 대부분 양 떼요, 쥐 떼였다. 진짜로 나답게 살고 싶고, 진짜로 나란 사람을 창조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보다는 ‘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 녀석 기숙사에서 백인 남자애 방에 총 들고 쳐들어갔잖아! 대마초 팔다가 외상값 받으러 간 거라더라.” 윌이 나온 사립학교는 명문 중의 명문 아니었던가? 그런 애가 왜 그런 시궁창에 빠졌을까?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는 사실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말할 수 있다. 힙합 시대의 흑인 남자로 존재하는 것을 연기했다고.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이다. 자신을 속여서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 문제는,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 윌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단 두 달뿐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를 경험함으로써 내 안의 나침반이 영영 다른 방향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가 지중해에 몸을 담갔고, 클로즈리데릴라에서 오랑주프레세를 마셨으며, 몽마르트르에서 일몰을 봤음을 자각했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드넓은 곳이고, 어디를 가든 나에겐 주변 환경을 누릴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자각했다. 또한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 누구도 내게서 그런 능력과 자격을 빼앗을 수 없음을 자각했다. 이런 깨달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Yo soy yo y mi circunstancia(나는 나와 나의 상황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가 프랑코 치하 에스파냐에서 피신해 아르헨티나 망명 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쓴 문장이다. (…) 나도 에디처럼 미국 흑인이 미국 밖에서 느낄 수 있는 경이로운 해방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또 우리가 대개 혼자서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으며 타인을 통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나 자신의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치를 알아가고 있었다. 이 타인들은 지혜로운 작가와 (실존 인물이든 가상 인물이든) 매력적인 인물의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 일상에서 만나고 어울리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운이 좋다면 이 두 갈래 깨달음의 원천이 한 줄기 진리의 강물로 합쳐져 내가 누구인지 혹은 지금껏 누구로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게 된다.
듀보이스는 말했다. "여러분에게 부와 권세가 생긴다면, 그러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당장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 제일 화려한 옷을 입고, 제일 비싼 저녁을 대접하고, 제일 긴 신문 기사의 주인공이 되겠습니까? 설사 그런 것을 이상적인 상황으로 떠올린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것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껏 배척당했던 우리는 현란하고 번지르르한 것들에 대한 반감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만약에 세상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곳이라면 어떤 곳일지 그려볼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참된 영혼이 있다면, 만약에 우리에게 뜨인 눈과 날랜 손과 느끼는 마음이 있다면, 만약에 우리가 완벽한 행복에야 물론 이를 수 없겠지만 삶에 반드시 수반되는 고통인 근면한 노동을 하고 희생과 기다림을 감수한다면 인간이 자신을 알고,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을 발현하고, 인생을 즐기는 세상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또한 미국을 위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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