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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모든 사람은 자기 죽음의 주인이며, 죽을 시간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무런 걱정이나 고통 없이 죽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가슴의 기억은 나쁜 기억을 지우고 좋은 기억만 과장하는 법이며, 이런 책략 덕택에 우리가 과거의 짐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엔 그는 아직 어렸다. 그러나 배의 난간에 서서 식민지 냄새를 풍기는 동네의 하얀 돌기와 지붕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매들, 그리고 발코니에 널려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빨래를 다시 보자. 자신이 얼마나 향수라는 자비로운 함정에 쉽게 빠져 희생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콜레라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 전염병의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숫자를 밝히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가장 일상적인 장점 중의 하나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들이 느끼는 연민의 정으로,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는 아들의 입장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쓸쓸히 혼자서 과오를 범하고 있었을 아버지와 함께 있지 못한 것이 처음으로 가슴 아팠다.
그들은 느린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늙거나 병들거나 혹은 죽는 대신, 단지 시간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안개와 같은 다른 시절의 기억을 망각으로 여기게 될 때까지 그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내가 죽는 것이 가슴 아픈 유일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유일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인생이란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는 항상 되살아났고, 이내 그를 잊고자 하는 욕망은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릴 적에 어떤 아이가 그에게 돌멩이로 새를 맞힐 때 사용하는 마술적인 주문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맞는다, 맞는다, 맞지 않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그 아이는 처음으로 산에 올라갔을 때 새로 만든 새총으로 그 말의 효력을 증명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도록 놔둬요. 그럼 그 시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보게 될 거예요.”
스무 살 때의 뜨거운 흥분 상태는 매우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열정의 함정과 환상의 잔인한 조롱, 그리고 환멸의 신기루를 극복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늙은 부부처럼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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