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독서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
초등 2학년 때 피아노를 시작한 아이는 절대음감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첼로를 따로 배우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이 있었다. 전공을 할 게 아니라 첼로는 따로 배우게 하진 않았다. 피아노 콩쿠르를 단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아이의 취미생활은 피아노와 독서였다. 피아노 선생님께도 그저 음악이 즐거운 놀이 중 하나로 인식하게만 부탁했다. 6학년 막바지에 다른 이들 앞에서 피아노 치는 경험 한 번쯤 만드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아서 한 수 물렀다. 그저 싫증 내지 않고 계속 하기를 바랐다.
중1이 된 아이는 학기 초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기타를 3개월쯤 다니다가 베이스도 배우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주 2일 기타, 주 2일은 베이스를 배우고 있다. 보통의 아이들이 학교 수업 끝나고 학원에서 국, 영, 수로 시간을 보내는 반면, 우리 아이는 음악 학원에서 기타를 치고 베이스를 튕기다가 온다. 집에 도착하면 가방 집어던지고 피아노를 치다가 기타를 치곤한다. 요새는 흘러간 옛 가요, 그러니까 나도 부를 일이 별로 없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같은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기타를 친다. 코드가 비슷한 친구는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이는 주로 기타를 친다고 했다。
아이는 일찌감치 등교를 한다. 기타 가방을 메고 말이다. 학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칠판에 명언을 적어 놓는다. 아이가 부회장 공략으로 가장 먼저 적은 것이 학교 칠판에 명언 적어 놓기 였다고 한다. 정작 아이들은 관심이 없고 선생님이 명언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아이는 때때로 자신의 노트에 명언을 기록해 둔다. 그렇게 적어 놓은 것들 중 그날그날 괜찮겠다 싶은 걸 칠판에 적어 놓는단다. 그래서 아이에게 ‘책 속의 명언’ 같은 책을 추천한다。
꼬꼬무식 놀이 시간
놀 거리가 많은 아이는 공부할 시간이 없다. 매일 30분씩 하는 화상영어를 제하면 공부라고 할 만한 것을 할 시간이 없다. 영어는 초등 2학년 때부터 화상영어를 시작했는데 문법보다는 말장난 하기를 좋아하는 아이 성향상 역시 놀이처럼 꾸준히 하고 있다。아이는 주로, 영국식 영어를 쓰는 영화배우나 감독들 가운데 코크니(런던 토박이들, 특히 동부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용하던 억양) 식 억양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 그걸 따라 한다. 영화배우 마이클 케인의 발음이 그렇다며 영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경우는 포쉬 엑센트(영국 상류층 엑센트)를 쓴다며 또 영상을 보여주거나 그의 라디오 방송을 틀어 들려준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스네이프 교수(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인물) 성대모사는 내가 들어도 똑같은데 중1 아이는 그걸 또 따라 한다. 아이는 주로 그런 식으로 꼬꼬무식 놀이 시간을 즐기곤 한다。
얼마 전, 아이는 작아진 자전거 대신 사이클을 사달라고 했다. 선선해진 저녁 시간、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면 내게도 잔잔한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하루는, 아이가 친구와 함께 광교산에 가겠다며 호기롭게 나갔다. 1시간이면 다녀오겠다던 아이는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아 나갔다가 오후 2시쯤 들어왔다. 핸들에 문제가 있어 다이소가 가서 육각 드라이버를 사서 조이기도 했고、 산악용 자전거가 아닌 사이클을 타고 오르막을 가자니 꽤나 힘들었다고 한다. 어느 길에선 넘어지기도 했다고. 헬멧 때문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광교산 자락 호수에서 헬멧을 물로 적셔 쓰고 내려왔다고도 했다. 친구와 김광석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사이다도 하나씩 사서 마셨단다.
시험 대비 국, 영, 수를 하고 있지 않은 중 1 아이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공부 안 하는 아이를 둔 엄마가 생각 없이 아이를 놀게만 한다고 걱정할 수도 있겠다. 누구나 시절마다의 추억이 있을 거다. 그런 추억들이 많을수록 인생은 살만해지고 더 단단해지고 견딜 만해진 다는 걸 알기에 아이의 지금을 존중해 주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발견할 시간이 요새 아이들에겐 별로 없다. 짜인 스케줄에 맞춰 키워지기에 인생의 모든 시점이 경쟁이다. 이 단계를 이기고 나면 다음 단계를 넘어야 한다。 넘어진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닌、 누군가 넘어지기를 바라며 끝이 없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야만 살아남는다고 배운다。
자신만의 나무위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그 안에서 자기만의 학습법을 발견하기를 바란다。손잡고 하나하나 가르쳐 줄 수도 있다。처음엔 잘 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인생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공부를 해야만 할 때가 올테니 기왕이면 스트레스 풀 수 있는 출구가 다양하기를 바란다。 피아노 치고 기타 튕기고 베이스 치고 자전거 타면서 노래 부르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영어로 흥얼거릴 수 있는 정도면 힘든 일들도 그런 것들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침대 위에 널브러져 '듄'을 읽고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뱀파이어에 빠져 책으로 읽은 것을 영화로 보고 또 책과 비교해 가면서 그 안에서 자신만의 나무위키를 설계해 가면 좋겠다。
우리 아이는 그저 평범한 아이다. 오히려 도전하는 것이 어려워 천천히 가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하나씩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다짐하게 된다. 저녁마다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탈 생각이다. 선선해진 저녁 바람을 맞으며 단지를 몇 바퀴쯤 돌고 들어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야겠다。 테이블 앞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오늘이 있음을 자각하고 싶다。그래, 이게 바로 사는 맛이지! 인생 뭐 별거 있나. 취미생활 두둑하면 외롭고 쓸쓸할 시간이 없다는 거!
우리 집 중1은 취미 부자다. 그 옆에서 나 역시 부자로 산다. 우리 둘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글쓴이 김상래
융합예술 연구센터 <아틀리에 드 까뮤> 대표, 인문·예술 커뮤니티 <살롱 드 까뮤>를 운영하고 있다. 국회도서관 <상상예술관> 칼럼니스트로 미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화> 필진으로 미술 에세이를 쓰며 블로그 <까뮤의 그림 배달>을 통해 그림을 나누고 있다. 여러 기관에서 문화·예술 관련 지식을 나누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여러 권의 미술 서적을 집필 중이며, 저서로 <실은, 엄마도 꿈이 있었어>,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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