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1 아이는 요즘 뱀파이어 시리즈에 빠져있다. 아마도 그 안에 나오는 로맨스가 흥미로운 모양인지 책으로 읽고 영화로 보고 나무위키 찾고, 배우들을 모두 추적하느라 계보 하나를 넣는 중인듯싶다. 먹지 않던 토마토를 사달라고 한다든가 닭 가슴살과 달걀로 아침을 먹고 자기 전엔 스트레칭을 꼭 해야겠다고 한다. 아이 방과 거실 책장 사이 얇은 벽이 있다. 아이가 커가는 것을 가로로 길게 선을 그어 센티를 적어 두는 곳인데 요새 부쩍 그곳에 서서 키를 재 달라고 한다.
아이가 크는 일은 매일이 신기하다. 나보다 작든 아이가 어느새 쑥쑥 커서 내 키를 넘겼다. 이제 흰 벽의 가로줄은 바닥에서 보다 천장에 가까워져있다. 아이는 콩줄기처럼 천장을 향해 자라고 그럴수록 부모는 바닥을 향해 가는 것 같다. 100사이즈 교복 와이셔츠가 작아졌다며 사이즈를 늘려야겠다는 아이. 육아를 하며 나를 참 편하게 해 준 아이가 중1이 되어 대부분의 대답을 '싫어', '아니'로 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잘 크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건 너무 가깝게 붙어 있으면 느낄 수 없다. 몸은 가까이 있겠지만 한 발짝 물러나야 알게 된다.
나는 아이를 낳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장점이라면 나 혼자만을 위해 살지 않게 되었다. 책임감이라는 아이템은 아이 덕분에 획득한 셈이다. 열심히 살아갈 의지 또한 아이로 인해 강해지는 것 같다.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나 보다. 일에 대한 뚝심 같은 것도 아이로 인해 더 단단해지는 듯싶다.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가령, 독서를 하면 행복해진다는 점. 학교 사서 선생님이 "네가 고유한 이구나."라고 했다며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근래 들어 두께가 상당한 시리즈물을 몇십 권 빌려온 거 같다. 주로 과학과 지리 관련한 책은 아빠를 위해 빌려오고 아이는 듄과 관련된 책이나 뱀파이어 시리즈물을 빌려오곤 한다.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책은 언제 읽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딱히 여전히 공부랄 것을 안 하고 있다. 그저 책과 영화, 음악에 빠져 있다.
아이가 있어서 좋은 수많은 장점 가운데 단점도 있다. 늦게 결혼하고 늦은 출산으로 아이를 낳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작고 마른 상태에서 머리가 나만 한 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나았으니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첫 책에 분만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산후 후유증이 몸으로 나타날 때면 내 안에서 사람 하나가 나왔으니 당연하게 여길 일일 텐데 이렇게 비가 내릴 것처럼 세상이 어둑해지면 손목이 시큰 거리고 온몸이 쑤신다. 자다가도 추워서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이불을 목까지 덮고 다시 잠을 청한다. 내 모든 것을 몸과 맞바꾼 것 같기도 하다.
아빠는 어디도 아픈 적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갑자기 담도암 판정을 받고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빠는 늘 몸이 힘든 지경이 되면 알약 두 개 정도 털어 넣고 아무도 고생시키지 않고 가고 싶다고 했었다. 아빠는 엄마랑 실컷 여행을 다녔다. 암 판정을 받고도 서로 너무 힘들지 않게 적당한 상태로 떠났다. 황달도 없이 비쩍 말라빠진 얼굴이 아닌 예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 아빠의 두상이 그렇게 예쁜 줄 몰랐었다. 작고 동그란 두상이 볼록한 이마 덕에 더 귀해 보였다. 수의를 입고 있던 아빠의 얼굴이 기억난다. 꼬마 아이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아이를 위해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질 것들을 쟁여 두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비우고 또 비워내는 연습을 하다가 생이 끝날 시점엔 무엇도 남기지 않는 게 잘 살다가는 삶이란 생각이 든다. 채워야 할 게 있다면 궁금한 것들을 알아가는 것으로 채우고 정리하는데 시간이 들어가는 것들은 되도록 미리미리 없애는 게 좋겠다. 누군가의 짐이 되는 일은 참 별로다.
아이와 저녁 운동을 하러 나갔다가 슈퍼문, 뉴문을 보았다. 우리 둘 다 한참을 달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욕심낼 것 없이 비우고 사는 삶을 상상했다. 저녁으로 찜닭을 해주었는데 운동하고 나니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해서 루꼴라도 넣고 파스타를 했다. 아킬레스건 자극을 준다며 참새처럼 걷는 아이를 보며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인생에서 아이와 내가 슈퍼문을 보며 운동한 날은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그저 그런 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많은 날들이 있었지만 없던 날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남기려고 한다.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돈보다도 이런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 김상래
융합예술 연구센터 <아틀리에 드 까뮤> 대표, 인문·예술 커뮤니티 <살롱 드 까뮤>를 운영하고 있다. 국회도서관 <상상예술관> 칼럼니스트로 미술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화> 필진으로 미술 에세이를 쓰며 블로그 <까뮤의 그림 배달>을 통해 그림을 나누고 있다. 여러 기관에서 문화·예술 관련 지식을 나누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창의융합예술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문화·예술로 가득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고 있다. 여러 권의 미술 서적을 집필 중이며, 저서로 <실은, 엄마도 꿈이 있었어>,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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