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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 퍼치스 : 매일의 선택이 만든 덴마크의 헤리티지

차 외의 모든 걸 배제한 고집스런 브랜드

2026.05.18 | 조회 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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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acperchs.kr 
이미지 출처 : acperchs.kr 

 

안녕하세요, 사유입니다 🍵

오늘은 덴마크의 티 브랜드인 'A.C Perch's Teahandle'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해요~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과 광화문 '올리브베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 미니멀한 브랜드는 프랑스나 영국의 브랜드와는 다른 매력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성향은 결국 덴마크라는 나라의 정서와도 연결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1835년의 공기 안으로


진짜 오래된 것은 스스로 오래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자신을 증명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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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의 좁은 골목, 크론프린센스가데(Kronprinsensgade) 5번지

 

낡은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2026년이 아닌 1835년의 공기와 마주합니다. 천장이 낮고, 나무 선반에는 차 통이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카운터에는 황동 저울이 놓여 있고, 점원이 그 위에 찻잎을 올리면 추가 천천히 균형을 잡습니다. 공기에는 오직 마른 찻잎의 향만 떠 있어요.

 

이곳은 '에이씨 퍼치스 티핸들(A.C Perch's Thehandel)'입니다. 1835년에 문을 열고 단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은 차 전문점입니다.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차 전문점으로 알려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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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의 시작은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상인이 코펜하겐 크리스티안스하운에서 식료품점을 열었고, 그의 아들 닐스 브록 퍼치(Niels Brock Perch)가 1835년 4월 크론프린센스가데 5번지에 차에 특화된 작은 가게를 엽니다.

 

가게 이름의 'A.C.'는 그의 셋째 아들 악셀 크리스티안 퍼치(Axel Christian Perch)의 이니셜이에요.

 

아들 악셀은 18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게를 운영했고, 그 후로도 같은 자리에서 차를 다루는 일이 끊긴 적은 없습니다.

 

 

 

헤리티지의 두 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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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전통'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마케팅에 매료됩니다. 

 

001호에서 다뤘던 TWG가 대표적인 예에요. 

TWG는 2008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로고에 새겨진 '1837'이라는 숫자와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마치 유럽의 오래된 차 브랜드를 떠올리게 하죠.

시각적 요소 하나하나가 '오래된 차 브랜드'라는 인상을 위해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그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TWG는 18년 만에 전 세계 수십 개 매장을 운영하는 럭셔리 티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설계된 헤리티지는 복제가 가능합니다. 

 

TWG는 어디에 매장을 열든 같은 분위기가 복제됩니다. 어느 한 매장이 본점의 무게를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매장이 동등한 무게를 가지는 구조에요. 

 

(좌) 1835년 Perch's (우) 현재
(좌) 1835년 Perch's (우) 현재

A.C Perch's 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갑니다. 

 

1835년이라는 숫자를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어요. 문을 열면 시간의 흔적이 보이니까요. 

황동 저울이 여기 있고, 나무 선반도 저기 있고, 19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왔다는 사실이 공간 자체에 배어 있습니다.

 

오래돼 보이려는 노력이 없을 때, 진정성은 드러나요. 

 

TWG가 헤리티지를 만들어서 시스템으로 복제했다면, A.C Perch's는 한 곳에서 시작해서 여전히 그 곳이 중심입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예요. 

 

TWG는 '시스템'에 두었고, A.C Perch's는 '한 장소'에 두었습니다. 

 

 

오직 차만 있는 공간


 

A.C Perch's 매장에는 단순한 원칙이 있습니다.

본점에서는 차 외의 것을 팔지 않아요. A.C Perch's의 공식 설명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매장에서는 오직 차만 판매합니다.
커피와 초콜릿, 향신료의 향조차 섬세한 찻잎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단순히 매장 차원의 결정이 아니라 카테고리 정의의 문제입니다. 

 

마리아쥬 프레르나 TWG 같은 브랜드들이 차를 중심에 두고 인접 영역으로 확장해온 방식을 보면 Perch's와 결이 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마리아쥬 프레르 초콜릿, 과자, 말차소금, 젤리
마리아쥬 프레르 초콜릿, 과자, 말차소금, 젤리
마리아쥬 프레르 인센스
마리아쥬 프레르 인센스

마리아쥬 프레르는 차를 단순 음료가 아니라 디저트·요리·향까지 연결되는 하나의 감각 문화로 확장해왔습니다.

 

'(Tea)'를 '재료'로 사용해 티 인퓨전 디저트와 요리를 선보이고, 차 향 기반의 인센스까지 운영했어요. 

 

TWG 마카롱 & 초콜릿
TWG 마카롱 & 초콜릿

 

TWG는 차를 럭셔리 F&B 경험으로 확장했습니다. 1837 Black Tea & Blackcurrant 같은 시그니처 마카롱과 초콜릿, 브런치 메뉴 등을 운영하며 현대적 티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를 구축했지요. 

 

둘 다 "차와 함께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카테고리를 선택했습니다. 

 

A.C Perch's는 그 방향으로 가지 않았어요. 본점 매장에는 여전히 약 150종의 차만 있고, 아무것도 그 옆에 두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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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순함은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료해요. 

 

매장에 들어선 사람은 무엇을 살지 헤매지 않습니다. 점원과의 대화도 차에 집중되고, 향을 맡아보고, 찻잎을 손에 받아 들여다보고, 우려서 시음하는 모든 동선이 차 한가지로 모아져요. 

 

차 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나니 '차의 본질'에 집중하게 됩니다. 

 

 

 

휘게, 상실의 역사에서 피어난 평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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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Perch's는 다른 브랜드들 처럼 화려하게 확장하지 않고 단순함을 추구했을까요? 

저는 이 배경에 덴마크라는 나라를 관통하는 한 가지 정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휘게(Hygge)'입니다. 

흔히 '아늑함'으로 번역되지만, 그보다는 '내면의 평온함'에 가까워요. 

이 '휘게'라는 정서가 어디서 왔는지 따라가보면 덴마크의 역사 안에 단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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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한때 북유럽의 '제국'이었어요. 15세기 칼마르 연합 시절에는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까지 아우르며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200년에 걸쳐 천천히 모든 것을 잃었어요. 

1658년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를 스웨덴에 빼앗기고,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400년 동안 함께 했던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1864년 결정타가 옵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잃었고, 그 결과 영토의 약 40%, 인구의 약 38%가 사라졌어요. 

 

북유럽의 강대국은 어느새 작은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충격 속에서 덴마크 사회는 방향을 바꿉니다. 

1872년 시인 H.P.Holst가 쓴 한 줄이 이 시기의 정신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Hvad udad tabes, skal indad vindes."
  밖에서 잃은 것은, 안에서 얻어야 한다.

 

원래는 유틀란트의 황무지를 농경지로 개간하자는 물리적인 의미로 쓰였지만, 이 문장은 곧 덴마크 사회 전반의 정신적 방향 전환을 상징하게 됩니다.

 

군사적 확장 대신 삶의 질로.

넓은 영토 대신 시민의 행복으로. 

제국의 영광 대신 일상의 안정과 안락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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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게'라는 정서가 만들어지는데는 기후도 한 몫 했습니다.

덴마크는 북위 55도에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오후 3시 반쯤 해가 집니다. 12월의 코펜하겐은 하루의 대부분이 밤이에요. 

 

이런 환경에서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 보다 집 안에서 보내는 따뜻한 시간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양초를 켜고, 가까운 사람과 둘러앉고, 침묵에도 어색함이 없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 소박한 시간이 덴마크가 긴 어둠을 견디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이런 정서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덴마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동안, 

A.C Perch's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 차를 팔고 있었어요. 

 

화려한 확장 대신 안으로 깊어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A.C Perch's 처럼 한 자리에서 한 가지를 쭉 이어나가는 가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A.C Perch’s는 1835년 이후 변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현대화되어 왔습니다.

 

1998년에는 이미 온라인 스토어를 열었고, 이후 오르후스와 오슬로로 매장을 확장했으며 코펜하겐 공항 및 글로벌 이커머스 플랫폼까지 진출했습니다.

2005년에는 본점 위층에 영국 스타일의 티 룸을 열었고, 2006년에는 도쿄로 첫 해외 확장을 시도했죠. 

 

다만 이 확장의 결을 들여다보면, 앞서 본 마리아쥬나 TWG의 확장과는 방향이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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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 Perch's 의 티룸에서는 스콘과 핑거 샌드위치, 작은 케이크를 곁들인 클래식한 애프터눈 티가 제공됩니다. 

 

마리아쥬나 TWG가 차를 디저트의 재료로 번역한 것이라면 

A.C Perch's의 티 룸에서 차는 여전히 주인공이고 음식은 페어링이에요. 

차를 다른 카테고리의 재료로 변환한 게 아니라, 차를 마시는 시간을 확장한 것에 가깝습니다. 

 

온라인 판매도, 도쿄 매장도 같은 방향이에요. 

차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맥락에서 마실 수 있게 한 확장이지, 차 너머의 확장이 아닙니다. 

 

대신 A.C Perch's는 계절의 리듬 안에서 차 문화를 반복해서 새롭게 경험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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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것이 줄레테(Julethe), 크리스마스 티입니다.

검정색 '클래식 크리스마스 티'는 진한 중국 홍차에 정향과 오렌지껍질을 더한 차에요. A.C Perch's 에서 가장 오래된 레시피 중 하나로, 많은 덴마크 가정에서 매년 크리스마스에 즐겨 마시는 차라고 합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티'는 중국 백차에 사과, 계피, 오렌지, 코코넛을 더한 차 입니다. 

클래식 크리스마스 티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향긋하고 달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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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어드벤트 캘린더(Advent Calendar)도 출시됩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하루에 하나씩 열어보는 유럽식 카운트다운 박스로, 24개의 작은 틴 안에 서로 다른 차가 담겨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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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 디자인은 매년 새롭게 제작되고, 봄에는 이스터 블렌드 (Påskeblanding), 1년 12달치 차를 한 박스에 모은 연간 캘린더(Årskalender)도 있어요. 

 

 

2002년에는 덴마크 왕실의 공식 납품업체(Holder of the Royal Warrant)로 지정됐습니다. 이후 Queen Margrethe II(퀸 마가렛 2세)를 위해 만든 'Queen's Blend' 같은 왕실 테마 블렌드도 선보였는데, 공항 매장에서도 자주 판매되는 시그니처 중 하나입니다. 

 

변하지 않은 것의 목록은 짧습니다.

 

같은 주소

같은 카운터 구조

황동 저울

나무 선반과 차 통

본점에는 차 외의 것을 들이지 않는다는 원칙. 

 

 


 

매일의 선택이 만든 헤리티지  

 

 

TWG의 질문은 "어떻게 헤리티지의 무게를 만들어낼 것인가"였어요.

그리고 TWG가 찾은 답은 골드 틴, 1837, 럭셔리한 인테리어. 어디서든 같은 경험으로 복제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영리한 답이었고, 시장은 그 답을 받아들였어요.

 

A.C Perch's의 질문은 달랐습니다. "무엇을 옮기지 않아야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설계된 헤리티지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헤리티지의 차이는 어느 쪽이 더 옳은가가 아니라,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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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장소에 무게중심을 두려면, 그 장소에서 옮기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모든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가르는 안목이 필요해요.

 

A.C Perch's가 패키지는 새로 디자인하면서도 매장은 그대로 두는 이유, 글로벌 이커머스에 입점하면서도 본점은 코펜하겐에 두는 이유, 모두 이 안목에서 나옵니다.

 

1835년의 누군가가 카운터 위에 황동 저울을 올려둔 것이 헤리티지가 된 게 아닙니다. 그 저울을 19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치우지 않은 선택이 헤리티지가 된 거예요.

 

헤리티지는 시간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시간 동안 무엇을 옮기지 않을지 결정하는, 매일의 선택이 헤리티지를 만듭니다.

 


 

A.C Perch's 가 던진 질문과 그들이 쌓아나가는 헤리티지는 최근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저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매일의 선택이 쌓여나가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는 거겠죠?

어떤 선택을 쌓아나가야할 지, 정체성에 대해서 좀 더 딥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래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건 브랜드도,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쌓아나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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