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사유입니다 🍵
오늘은 미국의 티 브랜드인 '하니 앤 손스(Harney & Sons)'에 대해서 알아보려합니다.
지하실의 53세,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아들들

1983년, 미국 코네티컷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 솔즈베리(Salisbury).
53세의 존 하니(John Harney)가 자신의 집 지하실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6종류의 찻잎이 담긴 상자가 놓여있었고,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 중에는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떠돌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바친 여관 '화이트 하트 인(White Hart Inn)'을 매각하고, 차(Tea) 사업을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50대 중반,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나이에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뛰어든 것이죠.

이 무모한 도전의 씨앗은 1970년대 어느 날, 그가 운영하던 여관에서 싹 텄습니다.
영국과 뉴욕에서 차 사업을 하던 70대 영국인 스탠리 메이슨(Stanley Mason)이 은퇴 후, 이 곳으로 이주했는데 존 하니에게 여관에서 차를 팔아보라고 권유한 것입니다.
존 하니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날부터 약 10년 간 메이슨의 밑에서 차에 대해 배웠습니다. 최고의 차를 만드는 방법 부터 사업 운영에 이르기까지 차에 대한 모든 것을요.
그가 여관 손님들에게 자신만의 특별한 블렌딩 차를 대접하자 여관을 다시 찾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죠.
그리고 1980년, 메이슨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모든 차 레시피와 거래처를 존 하니에게 유산으로 넘깁니다. 존 하니는 그 유산을 받아들고 '하니 앤 손스(Harney & Sons)' 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이 이름은 사실 좀 기묘합니다.
그 무렵 존 하니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잘 몰랐을 겁니다.
큰 아들 마이크(Mike)는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와인 비즈니스에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참이었고, 둘째 아들 폴(Paul)은 해병대에 입대해 복무 중이었습니다.
'&Sons(아들들)'이라는 이름은 존 하니가 자기 사업에 붙인 작은 희망같은 거였어요. 언젠가 크게 성공해서 아들들과 함께 꾸려가는 모습을 꿈꿨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꿈에 부푼 존 하니가 마주한 미국은 '차'로 사업을 하기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습니다.
잃어버린 210년, 미국인의 영혼에서 차가 지워진 이유
1983년의 미국은 차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통계로 보면 미국인 한 명이 1년에 마시는 차의 양은 영국인의 1/10에도 미치지 않았어요.
왜 미국은 이토록 차를 마시지 않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미국 역사에 깊게 새겨진 '정치적 트라우마'와 '답습된 습관'이라는 이중 장벽 때문이었습니다.

1) 차(Tea)에 찍힌 반역의 낙인
시간을 210년 전으로 돌려봅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턴 항구.
담요를 뒤집어 쓴 한 수십 명의 남자들이 그리핀 부두에 정박한 세 척의 배(다트머스, 엘리노어, 비버호)에 올라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차 342상자(약 46톤)를 도끼로 부수고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이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보스턴 티파티(Boston Tea Party)' 입니다.
오늘날 가치로 무려 수십억 원에 달하는 차가 밤바다에 잠겼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전쟁'과 '세금'이 있었습니다.
1763년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쟁 때문에 발생한 막대한 부채를 갚으려고 식민지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어요.
- 1764년 설탕세(Sugar Act) : 식민지에 들어오는 모든 설탕과 당밀에 세금
- 1765년 인지세(Stamp Act) : 식민지에서 쓰는 모든 종이 문서(신문, 계약서, 카드게임 카드까지!)에 세금
- 1767년 타운젠트법 (Townshend Acts): 차, 유리, 종이, 페인트, 납에 세금
하지만 그들이 화가 난 이유는 '세금의 액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영국 본토 사람들이 내는 세금에 비하면 식민지의 세금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식민지인들이 화난 진짜 이유는 이거예요.

"우리 동의 없이 세금을 매겼다!"
영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세금은 의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거둘 수 있다" 입니다.
즉 영국인들에게 "내 동의 없이 세금을 매긴다"는 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노예 취급 당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어요. 영국 본토에 있는 의회에는 식민지 대표가 단 한 명도 없었죠.
영국 정부는 이 분노를 돈으로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당시 식민지에서 소비되던 차의 대부분은 밀수차였습니다. 영국 의회가 마음대로 세금을 걷어가는 것에 대한 '반발심'과 '높은 세금' 때문이었죠.
그런데 1773년 차법(Tea Act)을 통해 세금을 면제해 줌으로써, 동인도회사의 합법적인 차 가격을 밀수 차 보다도 싸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공식 루트로 들어오는 차가 싸졌으니 얼씨구나!하고 사겠지? 사는 순간 차에 포함된 관세를 내는거니 영국 의회의 과세권을 자동으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런 속내를 가진 교묘한 함정이었습니다.
보스턴 티 파티는 그 함정을 거부한 사건이었어요.
또한, "우리는 더 이상 영국의 신하가 아니다" 라는 정체성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 외의 다른 화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부서진 자물쇠 하나는 이튿날 새것으로 변상해 두기까지 했어요. 폭동이 아니라 극도로 절제된 정치적 저항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 사건이 만든 문화적 파장이 너무 커져버렸습니다.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영국 편"이라는 의미가 되어버린 거예요. 식민지인들은 점점 차를 멀리하고 다른 음료를 찾기 시작합니다.
2)남북전쟁이 가져온 미국인의 습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렀습니다.
병사들에게 매일 지급된 군용 배급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어요. 일부 기록에 따르면 병사 한 명 당 하루 36g 정도의 볶은 커피콩이 배급됐다고 해요.
4년 동안 수백만 명의 병사가 아침마다 모닥불 위에서 커피를 끓여 마셨습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그 습관은 그대로 가정으로 따라옵니다.
이때부터 커피는 미국인에게 단순히 인기 있는 음료가 아니라,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 됐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끓이고,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손님이 오면 커피를 내놓는 것. 이런 것들이 미국적인 것이 됐어요.

그리고 맥스웰하우스(Maxwell House)나 폴저스(Folgers) 같은 대형 커피 브랜드가 부엌을 장악하면서, 차는 완벽하게 미국인의 일상에서 밀려났습니다.
존 하니가 1983년에 차 사업을 시작한다는 건, 이 200년의 역사 위에서 시작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상업 대신 전도의 언어를 꺼내다

가혹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빈 시장이었으면 오히려 더 쉬웠을 겁니다.
미국에 차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마트 매대는 토마스 립톤이 세운 '립톤(Lipton)'이라는 노란색 박스로 가득 차 있었죠.
립톤은 대량 생산과 티백을 통해 '차의 민주화'를 이룬 위대한 브랜드였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차는 '저렴한 벌크 음료'라는 편견을 심어주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차는 풍미를 음미하는 음료가 아니라 빠르고 싸게 우려내는 가성비 생필품에 가까웠어요.
미국에 차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단지 립톤식의 차만 있었을 뿐이죠.
빈 자리에 무언가를 심는 것 보다, 이미 굳어진 인식을 다시 쓰는 게 훨씬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존 하니가 자신의 일을 설명할 때 선택한 단어는 '상업'이 아니었습니다. '개종'이었어요. 그가 바꾸려고 한 건 차를 모르는 미국인이 아니라, 립톤식 차에 익숙해진 미국인이었으니까요.
2001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차의 복음을 전하는 성 요한처럼요."
200년간 쌓인 역사적 장벽,
그리고 립톤이 만든 편견과 싸우기 위해선 '상업'의 언어가 아닌 '전도'의 언어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전도에는 아주 치밀한 두 가지 전략이 있었습니다.
슈퍼마켓을 우회한 남자, 호텔 로비를 선택하다

차를 거부한 나라에 차를 퍼뜨리려면, 차를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경로가 아닌 다른 길로 들어가야했어요. 립톤이 슈퍼마켓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슈퍼마켓 자체를 우회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경로는 바로 '호텔'이었어요.
23년간 여관을 운영한 사람이었으니, 호텔 산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 미국 호텔의 약점을 공략하기로 합니다.
당시 미국의 럭셔리 호텔들은 커피 서비스는 완벽했지만, 차 서비스는 형편 없었습니다.
럭셔리한 정장을 입은 부유층이 리츠칼튼 로비에 앉아 차를 주문하면, 직원이 먼지 낀 립톤 티백을 미지근한 물이 담긴 스테인리스 포트와 함께 내놓던 시절이었죠.
손님이 '진한 차(Strong)'를 원하면 우림 시간을 늘리는게 아니라 티백을 두 개 넣어 가져왔습니다. 호텔 직원들조차 차를 다루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존 하니의 전략은 단순했습니다.
차만 파는 게 아니라, 차를 다루는 방법까지 패키지로 제공하는 것!

그는 차를 납품하면서 호텔 직원들에게 찻잎 보관법, 정확한 물 온도, 우림 시간, 메뉴 추천까지 아우르는 교육을 패키지로 제공했습니다. 호텔 입장에서는 차 전문 인력을 채용하지 않고도 차 매출과 고객 만족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완벽한 제안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포시즌스, 리츠칼튼, 월도프 아스토리아를 시작으로 페닌슐라, 샹그릴라 같은 아시아계 최고급 호텔 체인까지 하니앤손스의 차로 채워졌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독특한 차 문화가 만들어졌어요.
미국에서 차는 가정의 음료가 아니라 호스피탈리티의 음료가 됩니다.
사람들은 집에서 차를 끓이는 게 아니라 포시즌스 같은 럭셔리 호텔 라운지에서 차를 경험했어요.
차가 일상이 아닌 특별한 호사이자 작은 사치가 된 거예요.
차가 문화에 진입하는 경로가 그 문화 안에서 차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것입니다.
차의 풍미를 와인의 언어로
존 하니가 차의 무대를 열었다면, 그의 큰 아들 마이크 하니(Mike Harney)는 미국인들이 차를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마이크는 코넬대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와 미국의 와인 분야에서 일해온 와인 전문가였습니다.
코넬 시절 그는 향미 화학(Flavor Chemistry)의 대가인 테리 에크리(Terry Acree) 교수 밑에서 와인의 풍미를 감각이 아닌 데이터로 분석하는 방법론을 배웠습니다. 와인의 어떤 화학 성분이 어떤 풍미를 만들고, 인간의 코와 혀가 그 성분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주로 연구했지요.

1988년, 마이크는 아버지의 회사에 합류합니다.
그가 한 일은 와인의 문법을 차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었어요.
- 아쌈은 풀바디에 몰티한 노트가 강하다.
- 다즐링은 머스캣 아로마와 라이트한 바디를 가진다.
미국인들은 차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와인에는 이미 익숙했거든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은 와인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캘리포니아 와인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Wine Spectator 같은 잡지가 대중화됐고, 와인 테이스팅이 중산층의 취미가 됐어요.
"이 와인은 어떤 토양에서 자랐고, 첫 모금에 어떤 풍미가 있고, 여운이 어떻다"
라는 식의 감상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국 나파밸리의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꺾은 그 유명한 '파리의 심판'도 이 시기에 생긴 일이죠. 오죽하면 미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와인의 나라(Wine Country)'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이크는 미국인들에게 생소한 차의 언어를 억지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이미 잘 쓰는 와인의 언어로 차를 설명했어요.
이 것은 놀라운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가격의 정당화'
미국인들은 와인 한 병에 50달러를 쓰는데는 익숙했지만, 차 100g에 30달러를 쓰는데는 익숙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차를 와인의 언어로 설명하면서 와인과 같은 가격대가 정당화 됐습니다.
"이 다즐링은 싱글 에스테이트에서 한정 수확한 세컨드 플러쉬 입니다." 라고 하면
그 것은 특별한 와인 같은 무언가가 되어 지갑을 열게 했습니다.
둘째, '차의 서사화'
와인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스토리를 담은 음료였던 것 처럼, 차도 그렇게 다뤄지기 시작했어요.
다즐링 한 잔에서 인도의 식민지 역사를 읽고, 일본 센차 한 잔에서 푸른 우지 차밭을 떠올리는 식의 감상이 가능해진 거에요. 음료에 서사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마이크 하니가 출간한 'The Harney & Sons Guide to Tea'가 미국 요식업계 최고 권위를 가진 상인 '제임스 비어드 어워드(James Beard Foundation Award)' 후보에 오르게 됩니다.
차가 와인과 동등한 반열의 '식문화'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240년 만의 역수출, 영국 왕궁에 도착한 미국의 차

존 하니의 전도가 어디까지 닿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2010년대 어느 날, 영국의 Historic Royal Palaces 재단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온 것입니다.
런던탑, 햄프턴 코트, 켄싱턴 궁전 등 영국의 왕실 공간을 관리하는 이 보수적인 단체에서, 왕궁 기프트숍과 카페에서 판매할 프리미엄 차의 블렌딩을 미국의 하니앤손스에게 맡기겠다고 제안한 것이죠.
240년 전, 영국 차를 바다에 처박았던 식민지의 후예들이 역으로 영국의 왕궁에 자신들의 이름이 박힌 차를 역수출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 CBS 뉴스는 이 사건을 두고 "리버스 브리티시 인베이전(Reverse British Invasion, 역-영국 공습)"이라 불렀습니다.

심지어 런던의 대표적인 럭셔리 호텔 '더 도체스터(The Dorchester)'가 어느 시점 부터 하니앤손스의 차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7년 "런던 최고의 애프터눈티(London's Best Afternoon Tea)" 상을 받았습니다.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라고 믿었던 애프터눈티의 최고 자리를 미국 브랜드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종류의 권위가 하니앤손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미국 최대의 미술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 이 하니앤손스와 콜라보레이션 컬렉션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세잔의 정물화, 모네의 수련 패턴이 새겨진 화려한 틴케이스에 담긴 차가 미술관 기프트숍을 채웠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건 단순한 상업적 콜라보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차가 박물관급 문화의 일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거든요.
1980년대 슈퍼마켓 매대에서 판매되던 싸구려 음료가, 2010년대에는 The Met의 큐레이션을 받는 음료가 된 겁니다.
차를 거부한 나라에서 시작된 전도가, 차를 만든 나라까지 닿았습니다.
&Sons, 희망이 사실이 되기까지
존 하니가 지하에서 지은 "&Sons"라는 이름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사실이 되었습니다.

큰 아들 마이크(Mike)는 1988년에 합류해 티 마스터가 되었고, 해병대에서 복무하던 둘째 아들 폴(Paul)은 1997년에 합류해 회사의 운영을 맡았습니다.
현재는 3세대인 알렉스(Alex)와 에메릭(Emeric)까지 전면에 나서 디지털 마케팅과 뉴욕 소호(Soho)의 세련된 플래그십 매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시작한 이 작은 사업이 뉴욕에 본사를 두고,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브랜드로 성장하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존 하니는 2014년 6월, 8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거대 글로벌 식품 기업들이 하니앤손스를 인수하고자 했지만, 이들은 단 한 번도 외부 투자자의 자본을 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약 300여 종의 차를 직접 테이스팅하고 블렌딩하는 독립 가족 기업의 자부심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하니앤손스가 걸어온 역사는 어찌보면 현대의 한국 차 산업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습니다.
차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입장에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커피가 지배하고 있는 커피 공화국, 이 거대한 장벽 앞에서 어떤 언어로 차의 가치를 전달해야할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차의 전도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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