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봄이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중간고사를 보고 어느덧 여름을 향해서 가고 있어요.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81기 문집부 신입 에디터를 소개하면서 우리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영화를 소개해요.
"I am the marsh. 나는 습지가 되었다." - <가재가 노래하는 곳> 中에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너와 나> 中에서
"I have a love in my life. It makes me stronger than anything you can imagine. 난 지금 사랑에 빠졌다. 내가 지금 얼마나 센지 넌 모를 거다."
- <펀치 드렁크 러브> 中에서
"Je ne crois pas en mes pensées. Je crois en ma foi. 나는 내 생각을 믿지 않아. 나는 믿음을 믿어."
- <겨울 이야기> 中에서
이번 호에서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네 작품을 통해 구독자님에게 '영화'란 무엇인지 함께 나눠 봐요.
'무비 올나잇'의 현장 스케치도 볼 수 있는데요. 점점 짙어가는 나무처럼 영공의 활동도 점차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구독자, 함께 떠나볼까요? 🧳✈️
FEELM 편집장 김예빈
➗️ 문집부 에디터가 나누다
새롭게 합류한 81기 문집부 에디터 3명이
구독자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시해요.
김민서 에디터가 구독자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소개해요.
박민제 에디터가 구독자에게 <펀치 드렁크 러브>를 소개해요.
이재연 에디터가 구독자에게 <너와 나>를 소개해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
<가재가 노래하는 곳, 2022>
감독 : 올리비아 뉴먼
Where the Crawdads Sing
드라마 · 미국 · 2시간 5분
가재가 노래하는 곳. 영화의 제목만 보았을 때 이 영화는 무슨 장르의 영화인지, 어떠한 내용일지 전혀 유추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인가 싶은 생각도 들게 만드는 제목이다. 장르조차 명확하게 유추할 수 없는 제목과 같이, 이 영화는 한 가지의 장르로 분류하라고 하면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장르가 들어있다. 그러한 다양한 장르를 적절히 조화시킨 것이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게 해 주는 장치로 작용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도심과 떨어진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며, 마을 사람들에게 ‘습지 소녀’로 불리는 주인공 카야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체이스’라는 남성이 시체로 발견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용의자로 체포된 카야의 재판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며, 카야가 그녀의 변호사인 ‘밀턴'에게 지난 삶에 대해 진술하는 플래시백 기법에 따라 진행된다. 영화 속 재판 장면은, 결국 카야가 승소하며 끝이 난다. 카야의 변호사인 밀턴은 카야를 편견과 오해로 바라보지 말고 법적인 근거들로 판단해달라고 마을 배심원들에게 호소하며, 평생 ‘습지 소녀’에 대해 편견으로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암시하는 듯한 결론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카야가 실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반전으로 작용한다.
영화 속 배경은 크게 마을과 습지로 나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문명을 뜻하는 마을과 비문명을 뜻하는 습지의 갈등이 나타난다. 습지 소녀라고 부르며 카야를 체이스의 살인범으로 확신하며 재판에 몰아세우는 마을 사람과, 그런 마을 사람들에 맞서는 카야의 모습으로 문명과 비문명의 갈등이 드러난다.
거시적 측면에서 해석하였을 때는 자연법과 실정법 개념의 균형점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연법은 생존과 행복의 추구를 최고 가치로 인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법은 항상 똑같은 효력을 지니므로 환경과 상황에 따른 인간의 판단에 근거한 실정법의 정의와 항상 일치하지 못함을 주장한다. 즉, 실정법과 자연법이 충돌할 때 우리는 결국 자연법을 옹호할 것이라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카야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사람을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체이스를 살해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채 남은 평생을 습지에서 살아간다. 카야에게는 자연법이 곧 법이며, 그러한 자연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생존의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카야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고려하여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고 방식은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이 영화는 결국 수많은 시련과 편견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비록 그 방식이 사회적 합의와 실정법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삶을 통해 정당성에 대한 고찰을 던지는 작품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받아야 할 보호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카야에게 가장 안전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진정 어디였을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우리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에 디 터 |김 민 서
백룸을 탈출한 발광체
<펀치 드렁크 러브, 2002>
감독 : 폴 토마스 앤더슨
Punch Drunk Love
코미디/드라마/로맨스/스릴러/로맨틱 코미디 · 미국 · 1시간 35분
영화 <편치 드렁크 러브> 속 공간들은 하나같이 광활하다. 물론 여기서 ‘광활’이란 단순히 시네마스코프가 의미하는 숫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배리의 사무실, 마트, 레나의 아파트는 끝을 상정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펀치 드렁크 러브>의 공간들은 몹시 폐쇄적이다. 잠시 뒤 언급할 주요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광활’한 공간은 그 스케일로 등장 인물들을 압도한다. 배리 이건이 어딘가-사무실, 누나, 레나 혹은 자신의 집, 식당, 마트, 병원 모두-를 나서는 모습들은 관객에게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 이는 베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도 -심지어는 강렬한 연기로 스크린 안팎을 한 번에 압도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조차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공간에 갇혀 있는 인물들은 마치 정형 행동을 하는 동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전화) 대화 도중에 한 공간을 빙빙 도는 형태로, 때로는 타의로 붙잡히는 과정을 통해 인물들의 동선은 제약을 받는다.
<펀치 드렁크 러브> 속 공간들이 가지는 이런 특성은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미학, 그중에서도 ‘백룸’(The Backrooms)⑴을 연상케 한다. 리미널 스페이스 미학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이 가공의 ‘장소’는 끝없이 광활하지만 텅 비어 있음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 괴담 혹은 크리피파스타(creepypasta)의 배경으로, 현실에서 어긋나거나 그렇게 느껴지는 공간들 자체의 기이함을 강조한다.⑵ 배리가 메리의 아파트 복도를 헤메는 신은 영화가 이런 현상 혹은 개념을 예견했나 싶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프 화이트 톤의 벽과 반복적인 출구/입구의 배열은 겹겹이 쌓이는 출구 표시와 더해져 영화의 비-장소적 특성을 잘 시각화한다.
특히 백룸의 핵심 설정이 ‘노클립 현상(Noclip)’ 이라는 점에서 약 17년의 시간 차를 뛰어넘는 <펀치 드렁크 러브>와 ‘백룸’ 간의 연결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주체인 배리 이건의 문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타당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는 ‘상관조차 없어’ 보인다. 이는 충돌 판정(Clipping)이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노클립’ 현상의 전제 조건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조건, 즉 ‘충족되지 않음’이 충족됨으로써 발생하는 일이다.
예외는 영화의 오프닝 신, 즉 ‘펀치 드렁크 멜로디’가 탄생하는 순간, 그리고 배리와 레나가 하와이에서 포옹하는 클라이맥스, 즉 선율이 시작되는 순간, 마지막으로는 함께 하모니엄을 연주하는 엔딩 신, 즉 선율이 종결되는 순간뿐이다.
상징적인 ‘펀치 드렁크 멜로디’를 비롯한 존 브리온의 스코어는 디제시스와 비-디제시스적 사운드의 형태를 오가며 끝없이 상호작용한다. 연주의 주체는 애덤 샌들러가 연기한 배리 이건으로부터 극장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영화는 배리 이건이라는 인물을 영화 가득히 퍼뜨린다. 중후반부의 타악기의 반복적인 비트는 어딘가 글리치한 질감과 더해져 -어딘가 오류가 난 것마냥- 루프 속에서 ‘백룸’을 탈출하는 배리와 그걸 지켜보는 관객을 압박한다. 선율이 끝난 후 배리 이건은 화면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렌즈 플레어를 통해 더 이상 (공간에 의한) 흡수의 대상이 아닌 발광(發光)의 주체로 비로소 존재하게 됨을 알린다.
⑴ 대중문화평론가 나원영은 위키를 참조해 “낡고 축축한 카펫의 악취, 단조로운 노랑 톤의 광기, 최대치로 웅웅대고 지직거리는 형광등의 끝없는 배경소음”,”갇혀버리게 될 대충 6억 제곱 마일에 달하여 무작위로 구분된 텅 빈 방들”, “평소에 조심하지 않다가 현실에서 노클립해서 나와 잘못된 구역으로 가게 된다면 결국에는 도착하게 될” 등의 수식을 사용하여 백룸을 설명한다.
⑵ 나원영, 《대체 현실 유령》, 마테리알, 2022, p. 138.
에 디 터 |박 민 제
너와 나
<너와 나, 2023>
감독 : 조현철
드라마 · 한국 · 1시간 58분
세미와 하은이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단짝 친구이다. 하은이는 최근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 신세를 지느라 수학여행에 갈 수 없게 되었고,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날 세미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그런 하은이와 어떻게든 수학여행에 같이 가려고 한다. 하은이의 캠코더를 중고로 팔아서 수학여행 갈 돈을 마련하겠다는 작전은 좀처럼 쉽게 풀리질 않고, 결국 세미는 감정이 격해져 하은이와 다투게 된다. 좋아하는 하은이에게 투정을 부린 것이 후회된 세미는 끝내 하은이에게 눈물로 고백하고, 하은이도 웃으며 그 마음에 화답해 준다. 영화의 말미에서 둘의 서투른 사랑은 마침내 잘 이루어진 것처럼만 보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동안 관객석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이유는 이 이야기가 ‘세월호 참사’를 직간접적인 소재로 다루기 때문이다. 영화는 2014년 당시 유행하던 가요를 배경 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장소적인 배경에서 위치가 경기도 안산임을 드러내기도 하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세월호’라는 세 글자는 끝까지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는다. 눈치가 느린 관객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세미와 하은이의 어설픈 첫사랑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연출 방식이 꽤나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세월호 참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목적은 애도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모든 것을 잠식하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 의식은 슬픔이나 애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이다.
너와 나. 여기서 ‘너’는 세미가 바라보는 하은이다. 하은이는 도대체가 속을 모르겠는 친구다. 양말이 낡아 떨어져서 발뒷꿈치가 다 보여도 그닥 개의치 않는 하은이. 이어폰을 콧구멍에 꽂고 안 들린다 장난을 치는 하은이. 휴대폰 속 저장명 ‘훔바바’가 누군지 절대로 가르쳐 줄 마음이 없어 보이고, 도대체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는 건지, 있다면 그게 누구인지 왜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없는 건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도통 알기 어렵다. 세미는 수업도 빼먹고 온종일 하은이 생각뿐이다. 하은이가 그렇게 좋아서 어떡하냐는 친구의 말에 코맹맹이 소리로 훌쩍이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삶과 죽음을 두루뭉술한 대강의 느낌으로 알아차린다. 죽음에 대한 불길한 꿈을 꾼 것보다도 당장 나에게 일어나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과 내 눈앞에 보이는 어떤 친구의 얼굴의 표정 하나가 훨씬 더 중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미스터리의 성격을 장난처럼 갖는다. 모르는 것들투성이일 수밖에 없는 너와 나 사이의 단서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은 세미의 긴 하루가 끝나갈 때쯤 퍼즐이 다 맞춰지는 것 같은 추리물에서의 쾌감을 의도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세미와 하은이의 이야기는 어설픈 첫사랑의 형식을 띤다. 둘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다. ‘나도 고등학생 때 친구랑 저런 대화 분명히 해 본 적 있다’라는 식의 기묘할 정도로 낯익은 자연스러움은 이 이야기를 관객에게로 확장시킨다. 관객은 세미와 하은이 같았던 자신만의 학창시절 친구들을 떠올린다. 유치해도 우리에겐 중요했던 커플 앵무새 인형,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꾸 틀리는 말버릇, 방긋 웃다가도 금세 토라져서 성큼성큼 먼저 앞서 나가는 마음, 이해할 순 없어도 일단 절뚝거리며 서둘러 쫓아가는 마음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하기도 하고 또 새삼스럽게 애틋해지는 부분도 있겠거니 싶지만, 그 시절을 살았다면 누구든지 있었을 법한 일상에서의 요란한 마음들은 꼭 스크린 속의 세미와 하은이에게만 기억되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다. 그렇게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눈을 비비고 싶어질 정도로 희뿌연 화면은 과노출의 부작용을 각오하고서라도 ‘꿈’이라는 설정을 만연히 드러내고자 한다. 빛과 거울이라는 시각적 소재는 관객의 눈을 흐려 놓는다. 이 과노출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눈이 부시게 연출했어야 했냐는 필요성에 대한 의문 제기는 결국 감독의 의도로 답변이 가능하겠다. 꿈이라는 소재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고집스럽단 소리쯤은 감수해도 좋았던 것이다.
거울 속 세미가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영화는 출발한다. 거울에 비친 사물이 실제에서 존재하지 않을 때 영화적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클리셰를 염두에 둔 이 연출은 세미의 움직임이 꿈인지 현실인지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짐작하게 한다. 거울은 또 한 번 등장하는데, 영화에서 세미와 하은이가 드러눕고 놀았던 정자에 달려 있던 거울은 감독에 의하면 실제로 단원고 근처에 있는 정자에서 가져온 소품이다. 그 거울에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학생들의 모습이 한 번쯤 비추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영화에서 활용하였다고 한다. 거울이라는 소재가 현실과 가상을 헷갈리게 하는 기점이 될 수 있다는 특성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소품의 사용은 결국 영화 속 픽션의 이야기와 현실에서 실존했던 사건이 서로 헷갈릴 정도로 맞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꿈의 기능은 과연 무엇인가. 꿈에서 우리는 그리운 얼굴을 다시 만나 볼 수도 있고, 내가 가지 못한 곳에 마음껏 가 볼 수도 있다. 흔히 꿈을 꾼다고 말할 때 그 의미에 있어서 어떤 것을 소망한다는 뜻도 내포되므로, 꿈이라는 소재는 ‘무의식적인 소망’을 표명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 ‘꿈’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다시 만나게 해 주는 매개체이고, 관객과 주인공을 잇는 연결 고리이며, 과거에 대한 복기와 미래에 대한 감지를 통해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기능을 담당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정확한 단어로 뚜렷하게 나타나기보다는 어떤 두루뭉술한 감정이나 느낌으로만 남는다. 이는 영화가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여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쉽게 알 수 없는 꿈의 형태로 막연한 느낌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은 왜인지 꿈에서 막 깨어난 느낌이 들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그저 이유 모를 애틋한 감정만 남은 상태에 처해지게 된다. 정확히 무슨 내용을 보고 들었는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고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건 분명히 꿈처럼 빛났으며 어떤 사랑에 관한 내용이었다는 것을 선연하게 느낀다. 다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꿈에서 깬 직후의 현실감 없는 얼얼한 감각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어서 관객은 꼼짝조차 하지 못하고 의자에 계속 앉아서 자신이 방금 본 것에 대해 심사숙고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기억 저편에서 마침내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관객도 있고, 끝까지 그러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만 사로잡혀 있는 관객도 있다. 꿈의 메세지를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즉 이 영화 자체가 거대한 꿈의 설계인 셈이다.
그렇기에 결말부에서의 세미의 고백 시퀀스는 훌륭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세미의 고백은 영화 초반부터 주인공의 단 한 가지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영화 속에서 하루라는 시간이 차츰 흐르는 동안 그 목적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자칫 일상적인 듯하면서도 나름의 동화 같은 기승전결을 마무리 짓는 데 성공한다. 세미의 고백은 따지자면 세미가 이전에 꾸었던 꿈에 관한 내용이므로 표면적으로는 플래시백의 형태를 취하지만, 음성으로 들리는 세미의 목소리와는 달리 영상으로 보여지는 시각적 정보가 전경화되면서 결국 스크린에는 사건 이후 홀로 남겨질 하은의 모습이 플래시포워드로 연출된다. 봄날의 계절에 춘추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던 수학여행 전날과는 달리, 해당 영상 이미지 속에서(세미의 꿈 이야기 속에서) 하은이는 짧은 소매의 하복을 입고 있고, 그 계절감을 처절한 생명력을 담은 매미 울음 소리가 만연에 확장한다. 빈 교실에는 하은이밖에 남지 않았고, 하은이는 어느새 절뚝거리던 다리가 다 나아 세미의 부축 없이도 복도를 잘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런 하은이의 곁에 세미는 더 이상 없다.
세미의 불길한 꿈은 불안한 고백으로 언어화되었다가, 마침내 불행한 현실이 된다. 관객은 이 불행한 현실을 기억 끝에 인지하고 있기에, 세미의 불안한 목소리가 멎은 후 하은이의 마음까지 비로소 확인되었을 때조차 도저히 마음 편히 웃을 수 없다. 세미가 수학여행 짐을 싸야 한다며 발걸음을 떼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는 그 얼굴과 손짓이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워서 한 번이라도 괜히 더 붙잡아 보고 싶어진다. 어린 아이의 얼굴을 한 사랑이 너무나도 안됐다.
미리 안다先知는 것은 때때로 가장 선명한 종류의 고통이다. 영화 내적으로는 인물들이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방향의 이야기이지만, 영화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있었던 사건을 불러옴으로써 실제 죽은 이들이 캐릭터로 다시 살아나도록 생동성을 주어야 하는 의미 부여 작업이다. 관객은 이 교차점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위치에 놓인다. 영화를 따라가는 동안 세미와 하은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다가도, 익숙한 슬픔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미래를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진다. 그렇게 관객은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삶이 최대한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애도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영화의 주제 의식은 ‘사랑’으로 좁혀진다. 하은이와 세미의 이야기를 두고 봤을 때 이 영화의 제1 주인공은 결과론적으로 생존자였던 하은이가 아닌 죽은 쪽이었던 세미였고, 그렇기에 이 영화의 주제는 단순 납작한 슬픔이 아니다. 생존자의 입장에서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데 매몰되기만 하였다면 영화의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제1 발화자는 세미이다. 세미의 입장에서 시작되고 전개되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결국 사랑이다. 세미는 하은이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하은이가 했던 말의 속뜻을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하고, 이리저리 추적한다. 그 모든 피곤한 일과의 이유는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마냥 슬퍼하거나 애도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실제 참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택한 애도의 방식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 애도의 방식까지도 사랑으로 하겠노라고 선택했을 뿐이다.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이나 사고를 영화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윤리성의 문제는 언제나 연출자의 경각심을 요구하는 예민한 부분이다. 영화를 본 관객이 해당 참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면, 영화 제작자는 영화의 극적인 연출을 극대화하겠다는 이유로 실제 피해자들에게 상처가 될 만한 연출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세심하게 잘 짜여져 있다. 유족들의 슬픔을 영화를 위한 도구만으로 소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란 감정 자체를 아예 없는 것마냥 덮어놓고 부자연스럽게 절제하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잃어버린 진돗개를 되찾은 주인의 독백은 그래서 더욱 절절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돌아올 수 없다면 고통이라도 없었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줄줄이 늘어놓는 대사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이 계속해서 되뇌이던 말들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겪었던 비극에 있어서 기억과 위로를 할 적절한 방식을 고르는 문제는 해당 사건으로부터 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이 영화는 그 해결점을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제시한다.
눈이 시릴 만큼 빛나던 생생함에 슬픔이 군데군데 덧기워져 있는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까.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꿈에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래서 마지막으로 해 줄 말이 있다면 — 과연 어떤 말을 선뜻 뱉을 수 있을까?
결국엔 사랑한단 말밖엔 없을 것이다. 풀밭에 누운 채로 잠을 자는 듯 눈을 감은 미동 없는 표정. 내 속도 모르고 그렇게나 평온해 보이는 얼굴에 대고 끝없이 속삭여 주겠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에 디 터 |이 재 연
➗️81기 부원이 나누다
강석준 부원이 구독자에게 <겨울이야기>를 소개해요
겨울 이야기를 보고
<겨울 이야기, 1992>
감독 : 에릭 로메르
Conte d'hiver
드라마 · 프랑스 · 114분
1. 냉소주의와 희망
정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종종 기적에 관한 이야기나 영화 앞에서 무장해제 상태가 된다. 평소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이나 극적인 순간만을 바라며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되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이라는 비관에 가까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기적을 간절히 바라게 되고 만다. 이러한 나의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냉소주의와 희망에 대한 발췌를 소개하고자 한다.
2024년 8월, 새로운 음반 <Wild God>과 함께 돌아온 닉 케이브는 CBS의 ‘레이트 쇼’에서 스티븐 콜베어와 대화를 나누다 스톡홀름에 사는 팬으로부터 온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편지의 내용은 지난 몇 년간 자신이 비관적으로 변했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이러한 태도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까지 전해질까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닉 케이브에게 직접적으로 묻는다. “당신은 여전히 우리들을, 즉 인간을 믿나요?” 닉 케이브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그 팬에게 직접 보낸 편지를 읽는다.
“발레리오에게, 저는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경멸하며 보냈어요. 그것은 유혹적인 동시에 빠지기 쉬운 태도이죠. 사실, 저는 어렸고, 다가올 일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 삶의 소중함과 본질적인 선함을 배우는 데에는 꽤나 큰 충격이 필요했습니다… 냉소주의와 달리 희망은 힘들게 얻는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끔은 지구상에서 가장 보호하기 어렵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하죠. 희망은 중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희망은 적대적인 태도이며, 냉소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전사의 감정이에요. 아무리 자그마한 구원이나 사랑의 행위일지라도, 예를 들어 어린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거나, 노래를 불러 주거나, 신발을 신겨 주는 행위 같은 것들은 악마를 구덩이 속에 가둬 두는 거예요. 이것은 세상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치가 있으며 방어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믿을 만한 가치가 있고, 우리는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작가 김소영은 그의 저서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앞의 두 발췌에서 우리는 영화에서도 보여지는 공통된 태도를 알 수 있다. 희망을 가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끈질기게 믿고 기다리는 것은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을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모두가 경험해 봤듯이 사람은 언제든지 절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로메르는 이래라 저래라 설교하는 대신, 그가 삶을 대하는 방식을 이미지와 대화로 보여준다.
2. 파스칼의 내기
널리 알려져 있듯 로메르 영화는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 없이도 재미있다. 시네마테크 레퍼토리 중에서 그의 영화만큼 널리 사랑받는 작품들도 없다. 유머러스하고 귀엽지만 여타 예술 영화에서 예상되는 복잡성과 권위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동 세대의 훌륭한 시네아티스트들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영화를 통해 세상과 맞설 때, 로메르의 인물들은 이성을 앞에 두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러닝타임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혼란스러워하고 망설이는 남녀들의 단순한 이야기들을 보고 듣는 것은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것을 귀찮아하는 나에게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의 지적 유희를 가져다준다. 나의 삶과 가장 가까운 동시에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을 단순하고 가볍게 전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 로메르 영화에 소우주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겨울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잠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장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파스칼의 내기와 플라톤이 언급된 장면이다. 파스칼이라니. 유럽 출신으로 추정되는 철학자의 이름만 나오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나에게 파스칼은 익숙하긴 했으나 쉽지 않은 상대였다. (물론 그들의 짧지 않은 지적 토론이 나오긴 하지만 감정의 진실은 펠리시의 눈동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메르는 이전부터 파스칼의 내기를 소재로 하여 본인의 영화나 희곡에서 많이 다뤄 왔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그의 희곡 <피아노 3중주>에서의 그것이 유명한데, 심지어는 <파스칼에 대하여>(On Pascal) 라는 제목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피아노 3중주>에서는 직접 파스칼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극 중 등장 인물 파스칼 그레고리가 다른 등장인물 제시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내기에 대해 암시한다. “당신이 내게 말해 줬으면 하는 문장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소. 당신이 자유의지로 그것을 말한다면 내가 참 기쁠 터이기에, 비록 그런 상황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낮음에도 나는 그 순간을 희망하며 살기를 선호하오.”와 같이 말이다.
그럼 이제 파스칼의 내기에 대해 알아보자.
파스칼의 내기는 다음의 표로 설명할 수 있다.
| 신이 존재함 | 신이 존재하지 않음 | |
|---|---|---|
| 신의 존재를 믿음 | 천국행 (영원한 행복 개이득) | 시간, 돈 낭비 (약간 손실) |
|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음 | 지옥행 (최악)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 (본전) |
신의 존재를 믿는 것(혹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믿음과 선택)에 대해 토론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파스칼은 이에 대해 위의 표와 같이 설명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적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론)
- 신이 존재할 확률을 어떻게 알아
- 신이 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 구원의 효용이 무한한가
- 신앙을 수단화한다
와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여기서 펠리시가 처음에 샤를에 대해 언급한 장면에 주목하고 싶다. 샤를에 대해 펠리시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그는 책이 아니라 삶에서 배웠어요.” 즉, 그는 학문적인 의미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삶에서 오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대사는 로메르 감독이 인물의 내면적이고 실질적인 지혜를 강조하는 데 사용하는 방식의 좋은 예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진정한 판단력과 삶에 대한 감각은 조금도 기르지 않고, 고리타분한 학문적 지식이나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만 간신히 키운 사람들에 대한 냉소. 삶을 대하는 실질적인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로메르에게 아무래도 파스칼의 내기는 실제 신의 존재(샤를의 귀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닌 그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비록 나와 같은 관객들의 두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나, 영화 속 이러한 철학적 대화들은 단지 일부 관객의 고통이나 지적 유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스칼이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을 소재로 한 대화가 영화 속 꽤나 중요한 극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 중 펠리시는 교육 수준이 높지는 못하나, 로익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의 ‘지식인적’ 대화에 끼어들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지고 있는 태도를 관객들에게 넌지시 제시한다. 펠리시의 개입을 통해 그와 샤를과의 연결성이 그저 막연한 연결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존재를 통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대화를 넘어 펠리시와 샤를이 조응하고, 피상적으로 보여지던 그들의 연결이 희미하긴 하나 본질적이게 되는 순간이다.
3. 영화와 기적
로메르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면에서 안티테제를 통해 전개해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겨울 이야기>의 경우, <봄 이야기>의 이야기와 정반대의 이야기(한 남자와 세 여자 대신, 한 여자와 세 남자), 그리고 <녹색 광선>과도 반대되는 이야기(남자가 없는 여자 이야기 대신, 여러 남자 중 하나를 못 고르는 여자 이야기)가 그 예시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 BBC가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보고 난 당시에는 실제 내용과 다르게 기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다시 카세트테이프를 찾아보며 그 내용에 큰 감동과 함께 매료되어 남자의 극적인 귀환을 다루는 <겨울 이야기>를 기획했다.
애당초 영화에서 ‘기적’을 다루고자 했던 로메르. 로메르의 영화는 여타 영화의 극적 구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당성의 규칙을 보기 좋게 비껴나가곤 한다. 이야기 전개 내내 드라마틱한 순간에 대한 암시가 존재하나, 결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의 궤적은 관객을 헷갈리게 하고, 인물들의 마음 속을 쉽사리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 남자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펠리시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녀의 감정은 특정한 이유로 규명되지 못하기에, 그저 어렴풋이 감을 잡으며 이야기를 따라갈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르자 뜬금없이 나타나는 기적. 하지만 이를 보는 우리들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감응하게 되는데, 이렇게 타당성 없는 기적이 효과적으로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의 영화를 통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로메르는 일상의 지루함과 무의미함을 영화에서 가장 잘 다루는 감독들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상의 불완전함, 그리고 틈새에서 발견되는 순간들은 쉽게 간과되며, 한없이 단순하고 투명한 일상들은 저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로메르가 만들어내는 차별점은 바로 우리의 행위들의 연속을 끈질기게 응시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자신에게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가 알고 싶은 사람들과 짧은 시간(러닝타임)을 보내는 것이고, 결국 그들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깨닫게 한다.”
영화 평론가 / 로저 이버트
타인을 거울 삼아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는 카메라와 화면을 통해 우리 마음 속 가까이에 자리한다. 살아가며 깨닫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정서적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패턴을 재생산해 보여주는 로메르. 그리고 어느 순간 나의 이야기가 된 펠리시의 이야기. 체현적 몰입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기적을 바라게 된다.
따분한 일상 속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본인이 실제로 그러한 고민들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간다고 말하는 자조차도 다시 돌아본다면 결국엔 일상에 녹아 있는 자신의 움직임이 곧 비슷한 고민의 과정과 숙고의 형태가 변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을 살아가며 무엇을 기대하고 기다려야 하는가? (나도 모르겠다.) 오락가락하고 알쏭달쏭한 삶과 그의 목적을 단번에 일깨우는 것은 바로 ‘기적’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길,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한 적이 없는, 그리고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강렬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발자크는 말했다. 한 마리의 연어가 백 마리의 개구리보다 낫다고. 우리가 열망하는 덧없는 열정보다 진정한 애정이 백 배, 아니 천 배의 사랑을 안겨 주는 법이라고. 그래서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에 믿음을 일깨우는 기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영화는 기적을 말해야 한다.
일련된 질문에 대한 로메르의 영화적 응답은 기적을 지극히 우연한 일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보는 이들은 둘의 만남을 우연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이 필연적인 기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리라 믿게 된다. 펠리시는 샤를과의 재회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항상 그를 선택한다. 그리고 샤를을 우연히 만난 후, 펠리시와 우리는 직감적으로 기적이 찾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샤를이 딸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펠리시가 짓는 웃음과 그를 바라보고 미소를 짓는 우리가 바로 그것이다.
4. 마치며 / ‘오, 사랑’ 과 ‘Seaforth’
영화를 보고 난 뒤 평소 즐겨 듣던 두 곡이 생각났다. 하나는 루시드 폴의 ‘오, 사랑’, 그리고 다른 하나는 킹 크룰(King Krule)의 ‘Seaforth’. 평소 멜로디파(派)인 본인은 요즘 들어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주로 찾아 듣고 있다. 아직 완전한 가사파는 아니지만,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난 뒤 비슷한 내용을 노래하는 음악들이 떠올라 여러분께 추천해 본다.
루시드 폴은 ‘오, 사랑’에서 멀리 있는 그대가 볼 수 없고,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찾아와도 봄볕을 잊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마찬가지로 킹 크룰도 도시가 불에 타고 행성이 무너지며 종말을 맞이해도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어두운 시기를 함께해도 “자기야 이 믿음이 내가 가진 전부야” 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 나아가 지금 보고 듣고 겪는 것 너머 다른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과 모습은 항상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부 원 |강 석 준
- [나누다] 코너에 소개된 글은 2025년 서강영화공동체 문집으로 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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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공소식
🍿 무비 올나잇
하루를 크게 반으로 나눈다면 해가 뜨고 짐을 기준으로 낮과 밤이 되겠다. 밤은 다시 저녁부터 한밤중, 그리고 새벽으로 길어진다. 동이 틀 때까진 영원히 밤이다.
저녁 7시 LA, 밤 10시 뉴욕, 새벽 4시 파리, 새벽 4시 로마, 새벽 5시 헬싱키, 그리고 저녁 8시 서울 — 영화 하나로 밤을 꼬박 새겠다는 열정 좋은 시네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서로 안면을 트거나 이름을 물을 새도 없이 무비 올나잇은 곧바로 시작됐다.
첫 번째 상영작은 짐 자무쉬 감독의 <지상의 밤>. 다섯 개의 각기 다른 도시에서 펼쳐지는 한밤중 택시 기사와 승객 사이의 만담을 옴니버스로 엮은 이야기다. 늦은 밤에 비싼 값을 지불하기를 감수하고 잡아 탄 택시라면 그저 무탈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하기를 바랄 수 있겠으나, 영화 속 다섯 개의 야간 택시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꾸만 시끌시끌 요란하다.
첫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난 뒤, 어색하면서도 약간 들뜬 실내의 공기는 어쩌면 그 야간 택시와도 같았다.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름도 잘 모르는 채로 어린 시네필들은 말을 트기 시작했다. 음식과 술이 나오기 시작하고 행사는 물 흐르듯 진행됐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몇 개의 영화 관련 퀴즈가 있었고, 흥미진진한 경품 추첨도 있었다.
제각기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요즘 눈여겨 보는 배우나 감독은 누군지, 기다리고 있는 개봉 예정작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 떠드느라 흥분한 말소리들은 쉽사리 끊이질 않았다. 밤은 길고 사람은 북적이고 그 긴 밤 사이 영화는 두 편이나 상영되었으며 그렇게 영공은 지칠 줄 몰랐다.
영공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무비 올나잇’은 사실상 MT의 가벼운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알콜의 힘을 빌려 밤을 새고 친목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제는 5학년이 되어 버린 에디터 본인도 몇 해 전쯤 영공 올나잇에서 처음 본 얼굴들이 여전히 가까운 곁에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좋아하는 취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을 찾는다는 건 참 복에 겨운 일이다. 그리고 그 취미가 영화라면 그 행운을 발견할 적소適所는 바로 영공 올나잇이다.
지상의 밤, 멋쩍은 택시 안의 적막을 굳이 깨고 싶은 이들이 모이는 곳. 함께 밤을 새고 차가운 바람 한 가닥에 아침이 왔음을 깨닫는다면 그때쯤엔 이미 아깐 분명 모르는 낯이었던 내 옆에 앉은 얼굴이 어느새 심히 익숙해져 있을 테다. 그런 재미가 3월 마지막 금요일에 진한 의미를 한 겹 덧발랐다.
에 디 터 |이 재 연
🎞️ <4회차 감상회 : 자전거 탄 소년>
🚲👦🏻💔👨🏻
2025년 3월 27일 (목)
<자전거 탄 소년, 2011>
Le gamin au vélo
감독 : 다르덴 형제
드라마 ·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 87분
2022년, 수능이 끝난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를 즐겨 찾아보던 제게 그 시절은 큰 추억거리로 남아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걱정 없이, 오로지 영화에만 몰두한 채 즐겁게 지낼 수 있었기에 더더욱 소중했고 행복했던 시기였죠. 그러나 그때 어떤 한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영화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지도, 걸작을 만났을 때의 황홀함을 느끼지도, 서강영화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영화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영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게끔 만들어준 그 영화는, 제 ‘인생영화’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아니지만 ‘첫사랑’같은 영화라고는 칭할 수 있겠네요. <자전거 탄 소년>은 벨기에의 위대한 다르덴 형제 감독님의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그 이전 <로제타>와 <더 차일드>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고 <로나의 침묵>으로 칸 영화제 각본상, <로제타>와 <아들>로 각각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의 영화는 분명한 철학이 있고, 지켜야만 하는 규칙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영화인 <자전거 탄 소년>에서 이런 생각들은 깨지게 되었습니다. 기존에는 사용하지 않던 음악을 삽입하기도 하며, 엔딩 장면에서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한 영화를 넘어선, 필모그래피 전체를 감싸는 묵직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상단장 심효민
우수 한줄 감상
장원준 버림당하는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주변어른들의 꾸준한 관심이 아이의 올바른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정재영 다른 모든 경우가 차단되고 난 뒤 찾아간 사만다,그러나 그 단 하나의 경우에서 시릴은 자신의 세상을 찾았다.
이채민 용서와 포용의 미덕
🎞️ <5회차 감상회 : 안녕, 용문객잔>
🍿🐉👯♂️👻🌧️
2025년 3월 31일 (월)
<안녕, 용문객잔, 2003>
Goodbye, Dragon Inn
감독 : 차이밍량
드라마/코미디 · 대만 · 82분
관객이 가득 들어찬 옛 영화관에서 고전 명작 <용문객잔>을 보는 사람들. 그러나 이내 관객석은 텅 비어버리고, 어딘가 이상한 정체 모를 사람들만이 그 안을 서성입니다. 매표원은 다리를 절고, 지붕에서는 물이 새고, 영화관에 유령이 산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아다닙니다. 이런 음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몇 안되는 관객들은 영화가 주는 전율에 눈물을 쏟아냅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할아버지 관객들은 실제 영화 <용문객잔>의 배우분들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대규모 영화관들에 밀려 옛 영화관들이 자리를 잃어가던 시절인 2003년이지만, 시간이 흘러 (특히 코로나 시대 이후) 대규모 영화관들 또한 범람하는 OTT와 유튜브 컨텐츠의 시대에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는 요즘, 극장은 잃어가는 영화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데에 필수적인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극장에 발을 들이는 것을 주저합니다. 지나가고 있는 문화에 대한 예찬을 아름답게 그려낸 차이밍량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은 그렇기 때문에 현 시대의 영화를, 특히 영화관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더욱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극장에 오랫동안 방문하지 않았던 분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이 영화를 보고 극장에 가서 공간이 선사하는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감상단장 양태현
우수 한줄 감상
양윤종 영화의 최대 강점인 화면을 최대로 활용하고 대사를 최소화한 점이 매력적인 영화. 정적 속에서 영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안정빈 절룩거려도 비가 와도 기어코 계속될 시네마의 잔상.
김가일 모든 것이 영원할 순 없겠지만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될까…
🎞️ <6회차 감상회 : 버림받은 천사들>
👼🏻🤪🤦🏾♂
2025년 4월 3일 (목)
<버림받은 천사들, 2000>
Englar alheimsins
감독 :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
아이슬란드 · 100분
지난 10월, 불과 몇 달 전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로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 감독님의 영화 <버림받은 천사들>을 보고 말이지요.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광인 취급을 받는 영화 속 주인공과 환자들을 보면 단순히 “쟤네들 그냥 정신병자 아냐?”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시도한 순간, 더 이상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정신 나간 미친놈들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엔 말입니다. 세상에 불만은 많지만 차마 분출은 못하는 사람, 버림받은 상처를 씻지 못해 항상 슬픔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서 동시에 너무 혐오하는 사람… 그들에게 ‘미침’은 어쩌면 제정신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살고는 싶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의 수단이 아닐까요? <버림받은 천사들>에는 제가 감정이입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미친’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어쩌면, 제 감상회 상영작 중 가장 내적이고 개인적인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감상단장으로서, 이런 영화를 한 편이라도 틀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영광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감상단장 심효민
우수 한줄 감상
박세하 망자의 낚시터엔 속박이나 굴레따윈 없다.
이천희 신이 빚은 개인의 세계에 위계를 불어넣는건 인간이기에.
최정원 '누가 그들에게서 날개를 박탈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 <7회차 감상회 : 욕망>
📸🎸🤡🎾🤔
2025년 4월 7일 (월)
<욕망, 1966>
Blow-Up
감독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드라마/미스터리/스릴러 · 영국, 이탈리아 · 111분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는 사진작가 토마스는 어느 날 공원에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가 우연히 밀회를 하는 한 쌍의 커플을 발견하고 숨어서 그들의 사진을 찍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인화한 사진들을 둘러보던 토마스는 확대된 사진들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건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끝내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흐릿해집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욕망>은 수많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한 엄청나게 모호한 영화입니다. 진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인식한 것을 곧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무엇인가. 결국,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섬세한 감정들을 세련되게 표현하며 모던 시네마의 거장으로 불리던 안토니오니는 이 영화에서 ‘진리’라는 것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시네마로 나아가며 수많은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집니다. 영화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분들이 계실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들끓는 에너지와 화려함 만으로도 아무런 철학적 배경지식 또는 사유 없이 재미있게 보실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일단 머리를 비우고 장면들을 하나씩 즐기신 다음, 영화가 끝난 뒤 내 머릿속에 상영되는 ‘두 번째 영화’를 곱씹어보는 또 다른 영화의 재미를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상단장 양태현
한줄 우수 감상
안정빈 없는 것도 있게, 있는 것도 사라지게 하는 예술이라는 마법
명수빈 우리는 직접 본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가 더 많다
박민제 현상 전의 필름은 칼과 펜으로 뚫을 수 없을 만큼 질기다
🎞️ <8회차 감상회 : 시계태엽 오렌지>
🎩🕰🍊👊🏼👁
2025년 4월 10일 (목)
<시계태엽 오렌지, 1971>
Clockwork Orange
범죄/드라마/SF/스릴러 · 영국 · 136분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이름은 아마 영화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감독을 꼽을 때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이름일 겁니다. 비록 그리 많은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영화마다 걸작을 탄생시켰기에, 가히 영화 ‘황제’라는 칭호도 아깝지 않은 감독입니다. 그런 그의 몇 편의 영화들 중, <시계태엽 오렌지>는 그의 최고작은 아닐지언정 가장 충격적이고도 동시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탠리 큐브릭 영화입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동시에 선정적이며 폭력적인 <시계태엽 오렌지>는 여러 시각적 요소들과 그 요소 안에 담긴 함의들로 하여금 관객들을 시종일관 불쾌하게 만듭니다. 보다 보면 이 영화를 만든 스탠리 큐브릭이 정말 무서워질 정도인데, 최고의 로맨틱 노래를 섬뜩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이 스탠리 큐브릭이 무서워짐을 넘어서 변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없는 <시계태엽 오렌지>는 아마 보신 모든 분들이 만장일치로 호평을 내놓을 작품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이게 뭐냐?”라는 반응을 보일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예 보기 역겨웠다는 반응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찾기 힘들 겁니다. 이번 기회에 문제적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다 같이 감상하시면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영화적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감상단장 심효민
한줄 우수 감상
안정빈 악은 태어나고 선은 교육된다.
김준범 '자신'만의 기준이 정말로 있다고 믿으십니까? 정말로?
윤재웅 너 치료된거야…
COMING SOON
26th 전주국제영화제
📅 81기 영공 캘린더
▶️ 3월 14일 (금) 개강총회 완료
🍿 3월 28일 (금)~29일 (토) 무비올나잇 완료
📽️ 5월 3일 (토)~5일 (월) 전주국제영화제 MT → COMING SOON 🍿
🎥 5월 9일 (금)~10일 (토) 제작단 워크숍 → COMING SOON 🍿
🎉 6월 2일 (월)~4일 (수) 작은영화제
⏸️ 6월 5일 (목) 종강총회
FEELM NO.10 만든 사람들
편집장 | 김예빈
교정·교열 | 강시형 김민서 박민제 이재연
에디터 | 김민서 박민제 이재연
객원 에디터 | 강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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