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제가 선택한 기다림인데.
자판기 오랜만이죠?
네, 오랜만이죠.
요즘엔 다들 카페에 가니까.
맞아요.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 없는 시국인지라. 찾는 사람이 더 없겠어요.
그렇죠. 사람들 자주 가는 카페에 가도 나를 찾기는 힘들다. 내 몸값이 저렴한 편이지만 드물다. 난 참 드문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멈춰 있으면 좀 나아요.
직접 찾을 일이 점점 없어지는데, 생각하면 그리워지는 게 있잖아요.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했어요.
저요?
네. 사실 저는 율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안 궁금한데 대충 예상은 가고, 또 율무가 정말 어떤 맛인지 모르는 사람인데 율무차를 뽑고 기다릴 때 제 상태는 확실히 기억나거든요.
확실히?
네, 확실히 저는 배가 고픈데 애매할 때 그때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저를요?
네, 뭔가 그때 달고 걸쭉하고 따뜻한 느낌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는 걸 깊이 느꼈어요. 덕분에 살았달까.
제가 누굴 살릴 줄은...
주로 추운 날의 복도나 거리에서 마셔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요즘도 출근해서 자판기에서 뽑은 건 아니지만 직접 타 마실 때가 있거든요.
확실히 꼬르륵 소리는 극복이 안 되시나보다.
네, 면역이 안 돼요. 남들 앞에서 배고픔을 들키는 과정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럴 것 같아요. 근데 또 이렇게 듣고 보니 뿌듯하네. 식사 대용이 될 순 없지만 그런 마음에서 저를 찾는다는 거잖아요.
네 뭔가 부담 없고 든든하달까.
저도 개인적으로 아쉬움은 있지만 이러나 저러나 제가 생각나는 한때가 있다는 게 좀 마음이 놓이네요. 그런 감각이 어느 세대까지 이어져서 제가 호출될지는 모르겠지만...
있다 보면 또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나다가 기억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새로운 관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네, 모든 게 그런 것 같아요. 기간은 좀 달라도 어느 시점이 오면 여전히 그대로인데 너무나 그대로여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환영받는 때가 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역주행이라고 하는 그런 거.
미련해 보일 정도로 성실한 거? 두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영원이 설명이 안 될 때 그렇게 한결같이 있는 걸 보게 되면 내가 뭐 도운 것 하나 없지만 염치 없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추신,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 이번에는 자판기 율무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전에 개인 작업으로 율무차에 대한 글들을 쓰고 있었는데, 하다가 멈췄던 이유가 뭐였지 곰곰 생각해도 역시 끈기 없음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더군요. 배는 고픈데 시간은 없고, 그럴 때 율무차 참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여러분에게도 '율무차' 같은 뭔가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반(半)예술대학 고양이는무엇일과 인생삽질전공 김다연
율무차러버로서 지나칠 수가 없었읍니다.. 주로 아침을 안먹었을 때 율무차를 먹는데, 가끔 설거지를 생각하면 귀찮아져서 그냥 참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손잡이 없는 컵에 뜨거운 율무차를 타서 옷소매를 늘려 잡고 사무실 자리로 돌아가는 두근거림이 생각납미다.. 그런데 비유없는 생활이 어떤 뜻인가요?
만물박사 김민지
다연님 저도 그 두근거림 알고 있슴미다.. 비유 없는 생활이란 직격탄처럼 반복되는 생활입니다.. 신선하게 빗댈 것도 없이 틀에 박혀 버린 '나'이기도 하고요. 날이 또 설레게 아침 저녁 가을 공기를 뿜어내고는 손 부채질을 하네요. 요즘 같은 날 사는 거 피곤할 때 있겠지만 자주 걷고 율무차 한 번 드세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