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 달래기

자판기 율무차 인터뷰

2021.09.02 | 조회 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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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비유 없는 생활은 가혹하다. 대부분의 생활 감각은 대화로 되살아난다. 아침 식사를 챙길 줄 모르던 내가 아침을 챙기고, 점심 식사라도 좋은 걸 먹어야지 벼르던 내가 뭘 먹어도 다음날이면 뭘 먹었는지 곧바로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되기까지 어떤 마찰이 있었던 걸까. 개개인에게 마모된 부분을 스스럼 없이 발견하고 또 이야기하고 나면 그래도 좀 나아질까. 자상이 아니어서, 그저 그런 타박상이어서, 말하기 애매했던 생활의 상흔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자판기 율무차를 기다리면서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제가 선택한 기다림인데.

자판기 오랜만이죠?

네, 오랜만이죠.

요즘엔 다들 카페에 가니까.

맞아요.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 없는 시국인지라. 찾는 사람이 더 없겠어요. 

그렇죠. 사람들 자주 가는 카페에 가도 나를 찾기는 힘들다. 내 몸값이 저렴한 편이지만 드물다. 난 참 드문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멈춰 있으면 좀 나아요.

직접 찾을 일이 점점 없어지는데, 생각하면 그리워지는 게 있잖아요. 그중에 하나가 아닐까 했어요.

저요?

네. 사실 저는 율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안 궁금한데 대충 예상은 가고, 또 율무가 정말 어떤 맛인지 모르는 사람인데 율무차를 뽑고 기다릴 때 제 상태는 확실히 기억나거든요.

확실히?

네, 확실히 저는 배가 고픈데 애매할 때 그때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저를요?

네, 뭔가 그때 달고 걸쭉하고 따뜻한 느낌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는 걸 깊이 느꼈어요. 덕분에 살았달까.

제가 누굴 살릴 줄은...

주로 추운 날의 복도나 거리에서 마셔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요즘도 출근해서 자판기에서 뽑은 건 아니지만 직접 타 마실 때가 있거든요.

확실히 꼬르륵 소리는 극복이 안 되시나보다.

네, 면역이 안 돼요. 남들 앞에서 배고픔을 들키는 과정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럴 것 같아요. 근데 또 이렇게 듣고 보니 뿌듯하네. 식사 대용이 될 순 없지만 그런 마음에서 저를 찾는다는 거잖아요.

네 뭔가 부담 없고 든든하달까.

저도 개인적으로 아쉬움은 있지만 이러나 저러나 제가 생각나는 한때가 있다는 게 좀 마음이 놓이네요. 그런 감각이 어느 세대까지 이어져서 제가 호출될지는 모르겠지만...

있다 보면 또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나다가 기억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새로운 관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네, 모든 게 그런 것 같아요. 기간은 좀 달라도 어느 시점이 오면 여전히 그대로인데 너무나 그대로여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환영받는 때가 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역주행이라고 하는 그런 거.

미련해 보일 정도로 성실한 거? 두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영원이 설명이 안 될 때 그렇게 한결같이 있는 걸 보게 되면 내가 뭐 도운 것 하나 없지만 염치 없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추신,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 이번에는 자판기 율무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전에 개인 작업으로 율무차에 대한 글들을 쓰고 있었는데, 하다가 멈췄던 이유가 뭐였지 곰곰 생각해도 역시 끈기 없음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더군요. 배는 고픈데 시간은 없고, 그럴 때 율무차 참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여러분에게도 '율무차' 같은 뭔가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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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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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半)예술대학 고양이는무엇일과 인생삽질전공 김다연

    1
    over 2 years 전

    율무차러버로서 지나칠 수가 없었읍니다.. 주로 아침을 안먹었을 때 율무차를 먹는데, 가끔 설거지를 생각하면 귀찮아져서 그냥 참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손잡이 없는 컵에 뜨거운 율무차를 타서 옷소매를 늘려 잡고 사무실 자리로 돌아가는 두근거림이 생각납미다.. 그런데 비유없는 생활이 어떤 뜻인가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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