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과학기술] 심장이 없어도 살아납니다, 스스로 참수하는 바다달팽이

2021.05.10 | 조회 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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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는 여우원숭이

매주 월요일, 따끈따끈한 최신 과학기술을 짧고 쉬운 글로 소개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던 과학 만화책에는 왠지 플라나리아가 꼭 등장했습니다. 몸길이가 3cm 정도 되는 아주 작은 편형동물로 깨끗한 1급수에서만 사는데 면도칼로 조심스럽게 반 토막을 내면 두 도막 모두 조금씩 재생해서 두 마리가 되는 신기한 생물이었지요. 플라나리아를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런저런 책에서 자꾸 보다 보니 괜히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플라나리아의 재생능력은 정말 엄청난데요, 2008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몸을 279조각으로 쪼개도 몇 주 후에는 완전한 개체로 되살아난다고 합니다. 신체구조가 워낙 단순한 생물인 데다가, 다양한 세포로 분화될 수 있는 만능줄기세포(pluripotent stem cell)가 전체 세포의 무려 20%를 차지하는 덕에 이런 재생이 가능하다고 하네요.

신체를 재생해 내는 좀 더 복잡한 생물로는 도마뱀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도마뱀이 스스로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죠? 플라나리아와는 달리 도마뱀의 꼬리 절단은 스스로, 즉 원하는 순간에 자기 의사로 할 수 있다는 점이 조금 다른데요, 이런 현상을 '자기절단(autotomy)'이라고 부릅니다. 일부 도마뱀과 도롱뇽이 꼬리를 스스로 잘라낼 수 있고, 갑각류나 곤충 중에서도 다리 몇 개를 끊어내는 종들이 있지요. 복잡한 동물에서 신체 부분을 완전히 재생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보통은 신체 중요 부위 대신 꼬리나 다리 같은 말단부를 잘라냅니다. 게다가 꼬리의 모양은 재생되더라도 꼬리뼈는 재생하지 못 하는 일이 많고, 피부 무늬의 패턴이 좀 달라진다거나 하는 등 불완전한 재생이 일어나는 경우가 보통이지요. 

그런데 2021년 3월 8일, 일본 나라여자대학의 미토 사야카 박사 연구팀에서 아주 극단적이고 특이한 형태의 자기절단을 보고했습니다. 바다 민달팽이 두 종류가 주인공인데요, 머리를 몸통에서 통째로 잘라낸 다음 몸통은 그냥 버리고(!) 머리에서부터 몸통을 다시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동영상으로 보실까요?  

영상을 보시면 몸통을 잘라낸 달팽이의 머리에서 새 몸통이 자라나는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논문 본문을 참고하자면, 우선 몸통이 잘려 나간 부위의 상처가 아무는 데 하루가 걸립니다. 몸통을 잘라낸 머리는 몇 시간 정도 지나면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해조류를 찾아먹기 시작하는데요, 나이 든 개체들은 먹이를 잘 찾아먹지 못해서 열흘 정도 지나면 몸통을 재생하지 못하고 죽기도 한다네요. 몸통을 잘라낸 지 7일 정도 지나면 심장이 재생되고, 20일 정도 지나면 몸통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달팽이의 자기절단은 좀 많이 특이합니다. 도마뱀이나 곤충 같은 일반적인 생물들이 꼬리나 다리를 잘라내는 이유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서예요. 도마뱀은 포식자에게 거의 잡아먹힐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을 때 꼬리를 잘라서 던져주고, 심장이나 허파 같은 중요 장기를 보존한 채로 달아납니다. 이게 정말 최후의 수단인 이유는 도마뱀의 꼬리는 평소에 영양분을 저장하거나 움직임의 균형을 잡는 등 실용적인 쓸모가 있는 기관이기 때문인데요, 꼬리를 잘라내고 어찌어찌 도망친 도마뱀은 비록 살아남기는 했지만 멀쩡한 도마뱀보다는 생존력이 당연히 낮아집니다. 짝짓기를 할 때도 꼬리가 없는 도마뱀은 기피되는 경향이 있어서 자손을 남길 확률도 낮아진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달팽이의 자기절단은 포식자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해요. 우선 보호색이 굉장히 발달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포식자에게 발견되지 않고, 몸에 독성이 있어서 애초에 이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포식자도 거의 없습니다. 진화론적으로 자기절단 같은 '비상탈출 수단'을 마련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연구자들이 머리를 핀셋으로 잡는다거나, 머리와 꼬리를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긴다거나 하면서 포식자 흉내를 냈을 때는 자기절단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연구진의 짐작에 따르자면, 이 달팽이의 자기절단은 포식자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외적 이유로 일어나기보다는 좀 더 내적인 요인 때문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아직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지는 못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몸 안의 기생충을 떨쳐내기 위한 기술일 것 같다고 해요.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자면 잘려 나간 달팽이 몸통에는 언제나 기생충이 들어 있었고, 머리로부터 재생된 몸통에는 기생충이 한 마리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반면 기생충에 감염되지 않은 달팽이들은 단 한 마리도 자기절단을 행하지 않았고요.

연구진들은 짐작 가는 이유를 하나 더 제시했는데요, 바로 달팽이들이 야생에서 살아가는 해조류 숲에서 해초에 몸이 얽혔을 때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몸통을 잘라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동영상 14초 지점을 보시면 달팽이 목덜미에 흰색으로 절취선 같은 게 보이지요? 연구자들이 달팽이 여섯 마리의 절취선에 나일론 실을 감아 뒀더니 그 중 다섯 마리의 몸통이 잘려 나갔습니다. 해초에 몸이 감겨서 그대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몸통을 버리고 권토중래를 노리는 거예요.

이 달팽이가 내장마저 버리고서도 몸통을 재생할 수 있는 데는 사실 비밀이 있습니다. 동물 중에는 특이한 경우인데, 평소에 먹는 식물성 플랑크톤의 엽록체를 몸에 받아들여서 스스로 광합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현상을 kleptoplasty라고 부르는데, 'kleptes'는 그리스어로 '도둑'을 의미하니까 말하자면 '엽록체 도둑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동물들이라면 내장을 잃어버렸을 때 영양분을 흡수할 수 없어서 머지않아 굶어 죽겠지만 이 달팽이는 내장이 재생될 때까지 광합성을 통해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여유롭게 몸통과 장기를 재생할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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