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글을 쓴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나, 업으로나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사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저는 글쓰기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생물학 전공자였고, 이과생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글을 쓰는 논술보다는 실험 보고서를 쓰거나 수리 논술을 푸는 것에 더 익숙했죠. 인문학적인 글쓰기는 교양 수업의 과제에 국한해 있었죠. 그때만 해도 글쓰기는 취미조차 아니었습니다.
10년이 흐른 지금, 저는 글쓰기를 빼고 논할 수 없는 인간이 됐습니다. 취재를 해 글을 쓰거나 창작자들과 소통하며 일하는 것이 제 커리어가 됐을 뿐더러 (뉴스레터를 포함해) 소셜미디어에서도 개인적인 글을 쓰며 세상에 연결됩니다. 커리어상 잠시 글쓰기와 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글쓰기로 돌아올 정도로 그것을 가까이 두게 됐습니다.
글쓰기는 취미, 혹은 생계 그 이상의 정체성으로 제게 뿌리내렸습니다. 어떻게 미적분을 좋아하던 아이가 글쓰기를 사랑하는,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무늬로 받아들이는 변화를 겪었을까요? 그에 관해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던 생각들을 최근 정리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우연히 ‘정체성 자본’(Identity Capital)이라는 개념을 접한 덕분이었습니다.
‘정체성 자본’은 2000년대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 그걸 나 자신과 타인에게 보여주는 방식이 ‘정체성’이라면, 정체성 자본은 그 정체성의 기틀을 만드는 투자라 볼 수 있어요. (내가 나다운 것도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임상 심리학자 맥 제이(Meg Jay) 교수는 정체성 자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해 ‘정체성 자본’은 나 자신의 스토리를 잘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필요한 경험, 역량에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얻는 겁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20대 초중반부터 글을 포함한 콘텐츠에 마음을 쏟으면서 제게 ‘창작자’라는 정체성과 정체성 자본들이 생겼던 것처럼 말이죠. 나를 나답게 하는 선택을 하면서 나다움을 축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정체성 자본’을 얻으려면 일단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글쓰기’가 갑자기 제 정체성이 된 걸까요? 우연히 글쓰기를 시작한 후로 10년이 흐른 지금, 제가 저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만들어온 과정을 반추해봅니다. 거기에는 20대의 혼란, 정체성 확립, 30대의 당혹감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글을 쓰게 된 표면적인 계기는 심플했습니다.
2014년 무렵에는 대부분 페이스북을 즐겨했는데요. 우연히 한 페이스북 그룹에 초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매일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유저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눈팅 하는 재미로 화면을 보다가 가끔 아주 짧은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그룹 내 사람들이 즉각 반응을 해준다는 게 재밌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단순한 흥미가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저는 매일 글을 썼습니다. 때로는 속으로 엉클어져 풀리지 않는 감정을 글로 표출하기도 했고, 혹은 번득 떠오른 단상을 수필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의 길이는 점점 길고 구체화했습니다. 그동안 묻어두었던 상념들,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들,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과 회피해왔던 생각들이 글로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10대 말~20대 초는 제 인생의 암흑기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19살에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와의 약속을 따라 의대 진학을 꿈꿨지만, 합격해도 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휴학하고 반수에 목숨을 걸었다가 알바를 하며 생계를 버텼습니다. 그렇게 스무 살 여름, 아빠가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삶은 계속됐습니다. 21살, 대학 캠퍼스에 돌아왔을 때 더는 세상이 이전 같지 않았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왜 열심히 살아야 할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생, 열심히 공부하고 주어진 삶을 착실히 살아가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어느 것에서도 아무 의미도 느낄 수 없는 상태였답니다.
교회에 매달리기도 하고, 수업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신의 뜻을 붙잡고 거기에 생의 이유가 있을까 간절했다가, ‘다 무슨 상관이겠나’ 싶어져서 수업도 안 가고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습니다. 한 가지 원칙은 있었어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까운 시간을 가만히 내버려두진 말자.’ 어쩌면 살아있음을 견딜 수 없어 부지런히 방황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글을 쓰게 되면서 저는 안정감을 되찾았습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너무 못났던 나 자신과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에 대해 마음을 토해내며 글쓰기에 매료됐습니다. 20대 초반에는 매일 글을 3편씩 쓸 정도로 할말이 많았습니다. 어디서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글은 제가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간이역의 역할을 해줬습니다.
글을 통해 타인에게 연결되길 바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록 주어진 일들, 예컨대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 준비를 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미래지향적인) 임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하나의 가설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를 냅뒀을 때 내가 자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일까? 일단 자유롭게 풀어놓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하다 보면 ‘남들이 안 시켜도 내가 알아서 찾는 일’의 패턴을 발견하지 않을까?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져온 공부, 성적의 굴레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나다운 무언가’를 고민하는 시기였습니다. 내가 나를 가만히 살펴보니 과 행사를 기획하고, 영상 제작 동아리에 들어가고, 2014년에는 학교 신문사에 제 발로 들어갔다는 걸 관찰했습니다. 결국 무언가 표현하는 것, 그걸 통해 기어코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경향성이 보였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생물학과 특성상 높은 성적을 유지해 의대, 약대, 치의대에 들어가는 친구들이 적잖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저는 ‘참 별난 언니’였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후회없이 오늘을 사는 데 갈급하고 간절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단 뭐든 하면서 점을 찍고, 그것들을 이어 그래프를 그리고 싶어했습니다.
‘정체성 자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저는 나를 나로 만드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고, 그걸 찾기 위해 일단 이것저것 시도했습니다. 이때 남들에게 보기 좋은 것, 남들이 말하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시키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야 당장 내일 죽어도 오늘 행복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최근 유튜브 채널 <요즘사>와의 인터뷰에서 책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의 송길영 저자는 비슷한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남들이 시켜서, 해야만 해서, 남들이 인정해줄 것 같아서 무언가 하는 것도 (당연히) 강력한 동기부여입니다. 하지만 정체성 자본은 내적 동기부여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려면 자기 정체성을 발굴하는 작업을 먼저 해봐야 하고, 그 정체성에 힘을 실어주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다움’을 점차 알 수 있는 거죠.
이런 방황의 시간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10대 때는 입시로, 20대 때는 취업으로, 이후에도 나이대마다 점수판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한가롭게(?) 정체성을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성인이 된 후 이것저것 탐색해보지만 그 과정을 정체성으로 충분히 곱씹을 여유가 없습니다. 초년생 때는 불안해서, 중년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다른 선택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여러 선택지를 앞에 두고 아직 ‘내가 생각하는 나’를 정하지 못한 상태를 ‘정체성 지연’(Identity Moratorium)이라고 부릅니다. 사춘기 시절의 고민이 사라지지 않고 성인이 돼서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겁니다. 어쩌면 20대 초반, 격랑으로 배가 난파하면서 저는 멈출 기회를 얻은 셈입니다. 예기치 않게 처음으로 나 자신을,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20대에 쌓은 정체성에도 위기는 찾아옵니다.
20대 중반부터 기자로 일하면서 ‘사람들의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했습니다.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직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로 고민은 없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콘텐츠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것,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치는 일이 저에게 잘 맞았습니다. 성실히 고민하고 깊이있게 쓰며 다른 생각을 하는 ‘나’의 일관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20대 후반까지 쌓아온 정체성 자본이 30대 직전에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창업 팀에 합류하면서 제게 전혀 다른 역량이 요구됐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콘텐츠를 만들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 제 소임이었지만) 그걸 통해 어떻게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아 돈을 벌지, 어떻게 다른 팀원이 그 소임을 잘 해내도록 이끌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생소한 미션이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이면서 누구나 ‘기대하는 역할’이 달라지는 걸 경험합니다. 저는 창업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그걸 일찍 경험했습니다. 글을 쓰는 날보다 다른 일을 하는 날이 늘면서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쌓여갔습니다. 사업은 잘 되고, 회사는 성장하는데 내가 보는 나는 정체돼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돼야 하는 기로였습니다.
혹자는 사람들이 컴포트존(Comfort Zone)에 안주하지 말고 불편한 도전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체성 자본 없이, 혹은 자기 정체성과 반대되는 도전에서 성립하기 어려운 주문입니다. 아직 내가 나를 모르는데, 거기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투자를 해야 한다고 독촉하는 격입니다. 적어도 돌아갈 집, 중심을 잡아줄 땅은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나라면 절대 창업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려면 때로는 내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선택을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압니다. 내가 보는 나의 상이 얼마나 더 풍부해질 수 있는지. 하지만 그에 따른 반작용, 후유증도 존재합니다. 스타트업 창업의 경험이 ‘나답지 않은 나’를 마주하는 선택의 갈림길이었던 것처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채 쉬기로 택했습니다. 당연히 조바심이 컸습니다. 다들 부단히 애쓰며 살아가는데 나만 이렇게 멈춰있는 게 말이 되나 싶었죠. 창업 팀에서 한 발 물러났으니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이는 반대로 어떤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였습니다.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 밀려들어 모든 이직 제안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남편이 저를 말렸습니다. ‘조급하게 선택했다가 ‘아닌가 보다’ 물러나길 반복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타일렀습니다.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30대에 들어서며 내가 쌓아야 하는 정체성 자본은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에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도전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환상에 속지 말고 나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30대의 정체성 자본은 20대의 정체성 자본과 조금 다르다는 예감이 듭니다.
20대 때는 그야말로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인지, 그 경향성을 처음으로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다양한 일에 마음이 끌린다는 걸 발견했고, 그걸 통해 사람들과 (잠깐이나마) 연결되기를 희망하는 나를 알아봤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지난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나를 이해하고 강점을 발견하면서 내 정체성이 뚜렷해졌습니다.
하지만 30대에는 보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 때는 손이 가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일단 경험했어요. 몸이 고달파도 속은 든든했습니다. 그렇게 초기 정체성 자본으로 제 곳간을 채운 지금, 이제는 ‘좋은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나’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다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숙고해야 어른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그러한 위기감 혹은 기대감으로 최근에는 몇 가지 시도가 뒤따랐습니다.
(1) 가치관에 대해 세세하게 질문하기
20대에 쌓은 정체성 자본은 저의 정체성을 ‘글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돼 영향력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연관된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30대에는 우선순위를 세워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똑같이 (글을 포함한 콘텐츠를 통해) 연결되는 경험, 영향력이라 해도 ‘넓이 vs 깊이’에서 저는 깊이를 추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투자를 해야 할지 보다 명료해집니다.
또한 20대에는 ‘남이 시키지 않아도 하는 일’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나를 중심으로 정체성 쌓기에 집중했다면 30대에는 이 정체성을 어떻게 타인과 이어갈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는 인생, 남에게 가치 있는 무언가 제시해야 벌어 먹고 살 수 있으니 ‘남이 나에게서 찾은 가치’가 무엇인지도 보다 세분화해서, 정직하고 솔직하게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2) ‘좋아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기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좇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건 정체성 자본에 투자하는 초기 단계에 매우 중요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다움을 벼르고 벼르다 보면 막다른 길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저는 창업 팀에 합류하고서 ‘이 길이 맞나’ 싶어 고민할 때 조언을 구했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것 같다’는 고민에 지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질문 덕분에 진퇴양난 같았던 고민의 벽을 우회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스텔러스 인터뷰로도 함께 해주신) 기용 님의 책 <실패는 나침반이다>를 편집하며 한 번 더 이 질문을 상기했습니다. 단지 ‘내가 기분 좋은 것’ ‘내가 잘해서 자신있는 것’을 넘어 ‘나’를 입체적으로 들여다 봐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선택해야 할 다음 선택지를 맑은 정신으로 고를 수 있습니다.
- 나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상처는 무엇일까?
- 나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은 무엇일까?
- 쓸모 없어지고 싶지 않다.
-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 버림받고 싶지 않다.
- 이것들이 ‘돈을 많이 벌고 싶다’와 직결돼 있나?
이렇게 문답과 소거법을 하면서 ‘돈을 더더 많이 벌어야 한다’ ‘계속 곱절로 성장해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차분함을 얻었죠. 초기 정체성 자본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주도적으로 시도하는 것들을 통해 축적했으니 그 다음 단계의 정체성 자본은 보다 깊은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하길 바랍니다. 그 밑작업을 종종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3) 내 시간과 에너지의 투자 원칙 세우기
무엇보다 정체성 자본은 자기 시간과 경험, 에너지를 일종의 자산으로 보고 투자하는 프레임워크라는 데 주목해봄 직합니다. 그렇다면 마치 자산 투자를 하는 것처럼 기준을 정립해 의사결정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안전자산에 70%, 위험/혁신자산에 30% 투자하는 전략을 정체성 자본에도 동일하게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제 경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안전자산 70% : 10년 가까이 쌓아온 글쓰기 역량을 십분 활용한다.
- 위험/혁신자산 30% : 콘텐츠 마케팅, 교육, 강의, 미디어 운영 대행 같이 (정체성의 결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낯설고 새로운 시도를 기꺼이 해본다.
2024년에는 각각에 큰 차등을 두지 않고 일단 기회를 붙잡는 오픈마인드를 우선시했습니다. 2025년에는 확고하게 안전자산 70%를 정해서 글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20대의 정체성이 30대의 정체성으로 성숙하는 데 공을 들여야겠다고 느낍니다. 여전히 30%의 ‘낯선 투자’를 하면서 말이죠. 정체성은 고이지 않고 흐르며 순환하는 것, 적응하고 변화하는 ‘상’입니다.
구글의 70/20/10 문법도 비슷합니다. 나를 나답게 하는 핵심적인 경험들에 70%, 비교적 새로 접하는 것에 20%, 해본 적 없는 일에 10%의 투자를 하는 식으로 응용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그동안 축적한 정체성을 단단한 기반으로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정체성 자본에 투자해 차차 ‘나다운 나’의 모습을 점검하고 업데이트하는 것, 이를 구조적으로 실행하는 방식입니다.
(참고 -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나이가 들어서 좋습니다. 그냥 나이든 게 아니라 그동안 모아온 정체성의 다음 챕터를 여는 30대를 맞이했다는 데 감사함을 느낍니다. 지난 10년간 글쓰기를 통해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처음 발견했다면 앞으로 10년간 내가 집중해야 할 나를 만들어가는 데 30대를 투자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쌓은 정체성 자본이 충만한 오늘, 설레는 내일을 자주 만들어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나이 들고 있나요? 최근 들어 10대 사춘기가 아니라 20대 사춘기, 오춘기가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자주 듣습니다. 어쩌면 정체성 지연에 따라 나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시점이 늦어져서 생기는 현상 같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 모른 척 하고 지내기엔 수명이 너무 길어졌고, 세상은 복잡하며,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맥 제이 교수는 본인 저서에서 “진짜 성인이 되는 시점은 30대이며, 20대는 아직 사춘기의 연장선”이라는 분위기("thirty-is-the-new-twenty")에 반기를 듭니다. 오히려 20대에 어떤 정체성 자본을 쌓느냐, 어떻게 초기 자본을 탄탄하게 쌓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30대를 맞이한다는 주장입니다. 주도적으로 나에 대한 경험을 쌓아야 드디어 나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정체성에 부딪쳐보는 초기 단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이것저것 탐색하는 ‘지망생 모드’입니다. 주도적으로 실패할수록 비로소 나를 마주하고, 그래야 정체성 자본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있고, 그에 대한 근거(정체성 자본)가 생긴 후에야 그 다음 단계인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결정, 몰입을 할 수 있습니다.
(참고 - 꿀스틱으로 매출 수억 원 만든 대표가 창업을 그만두고 다시 직장인이 된 이유)
지금 당신이 쓰는 시간에 이름을 붙여보세요. 매일이 모여 ‘나의 일부’가 되도록 이야기를 써보세요. 당신의 스토리가 어제보다 오늘 더 명료해지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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