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이 넘었을까, 소복이 흰 머리가 내려앉은 남자. 그는 아침 해보다 먼저 눈을 뜬다. 잠들기 전에 읽은 문고본 책을 정리하고, 좁은 싱크대 앞에서 콧수염을 다듬고, 단풍 분재에 물을 주고, The Tokyo Toilet이 인쇄된 작업복을 걸치고 집을 나선다. 매일 출근길을 함께하는 건 자판기 커피와 카세트 테이프 속 음악들.
카세트 테이프라니! 차를 얻어 탄 직장 후배는 고루함에 투덜거리다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런 테이프가 요즘에는 비싸게 팔린대요, 제가 아는 가게가 있걸랑요, 기어이 고집을 부려 그를 데려가는데 놀라운 사실. 이 낡은 테이프가 한 장에 몇만 원, 비싼 건 몇십만 원에 팔린단다. 선배, 제발 이걸 팔아주세요! 저는 돈이 없어서 썸녀랑 데이트도 못한다구요! 과한 투정을 부리는 후배에게 테이프를 돌려받고, 남자는 지갑에 있던 지폐 두어 장을 꺼내준다.
신이 나서 썸녀를 만나러 간 후배. 다시 혼자가 되고서야 굳은 표정을 푸는 남자. 거 참, 하하하 웃는데 이제 보니 차에 기름이 없다. 돈이라면 아까 후배에게 준 게 전부. 고민하다 결국 테이프 한 장을 들고 터덜터덜 가게로 걸어간다. 저 귀한 걸, 싶지만 괜찮다. 그에게는 카세트 테이프가 한참 더 있다. 지금도 충분하니 팔지도 사지도 않겠지만.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런 날들을 펼쳐 보인다. 매일 똑같은 일과에 조금씩 다른 상황과 사람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매일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 돌아보면 수많은 날들이 모두 나름대로 완벽했을 거다. 카세트 테이프를 고집하는 그의 오랜 취향에 어느새 큰 가치가 매겨진 것처럼.
어지간하면 인생은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작게 웃을 때가 많지만 크게 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결국 그대로 충분한 것이었다. 이 단순한 이치는 지루한 신파로 그려지기도, 오래 기억에 남을 인생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정말 잘 만든 영화였다. 몇 번 더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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