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정의 <그때의 우리>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원치 않는 이별에 익숙해지고, 다가올 끝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일 테다. 누군가를 보내기도, 나의 한 시절을 지나기도 했지만 이별이란 말을 들을 때면 마치 조건 반사처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올라온다.

내가 이별한 것들을 회상해본다. 서울에서 온 손녀를 기억하던 할머니, 계단을 올라도 아프지 않던 엄마의 무릎, 검게 물들이지 않아도 되던 아빠의 머리칼, 남몰래 누군가를 좋아하던 마음, 나를 대변해주는 듯한 영화를 사랑하던 시절, 이만큼 좋아하는 건 더는 없을 거라 여기던 음악들, 만날 수 없어도 벅차게 사랑하던 당신.

그때의 우리가 사랑하던 마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당신을(또는 그것을) 잊겠다 다짐한 적 없는데, 인파에 섞여 사방으로 퍼져나간 당신의 향수 흔적처럼 쫓지도 못하게 흐릿해져 버렸다. 이 또한 이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누군가와 ‘헤어지자’는 말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더욱 애달플 때가 있다. 나는 어느새 아무도 모르게 벌써 수십 번의 이별을 겪어 늙어버렸다.

친구가 없는 학교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버티던 시절을 닮은 영화에 울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십 년이 지나도, 이십 년이 지나도, 아마 죽을 때까지도 울컥하며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기억이 무뎌졌다.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음은 변함 없지만, 그래서 무어가 그리 고달파 미래를 기약하고 싶지 않았냐 묻는다면- 어릴 적 나의 세상은 그게 전부였다 답하고 말 것 같다. 지금의 내 세상은 더 넓어져 괜찮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괜찮을 거란 말을 건넬 수는 없다. 학교에서 벗어난 스물이 넘어서야 그 시절을 닮은 영화 속 친구들을 만났다. 실제로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일요일이면 극장에 모여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볼 것만 같았다. 그 상상으로 뒤늦게 지나간 상처를 보듬었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보곤 했던 그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나긴 겨울의 밤, 추위와 외로움을 견디며 봄을 틔우던 나무를 마냥 부러워하던 나도 이제 없다. 내가 세상을 떠날까 불안을 품었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내던 나는 어느새 다시 말 없는 첫째가 되었다. 달에 한 번 엄마와 짧은 오후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안심하지 않을까, 변명을 삼고 있다.

새로운 시작만이 답일 거라 울부짖던 난 어느 틈에 수용(受容)과 지속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사랑하던 노래에도 무뎌졌을지 모른다. 열 번을 넘게 들은 노래인데, 수천 명 틈에 서서 듣는 것이어도 울고야 말았었다. 매번 그렇게 울어대던 과거가 민망해 부러 찾아 듣지 않았었지만, 언젠가부터 무대 위 그도 겨울이면 꺼내어 부르던 그 노래를 떠나보낸 것 같아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가 같이 울먹이며 노래를 대하던 마음은 사라진 걸까, 다른 것으로 바뀐 걸까.

빚을 졌다고 느낄 정도로 기대어 사랑하던 것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잊음으로써 더 큰 빚이 생겨버렸다. 역시 사랑은 끊임없이 물을 주고 보살펴야 했다. 이렇게 헤어짐을 말하지 않아도 이별하는 사랑들이 있었다. 반대로 나이를 먹으며 이별해야만 하는 것들을 마주한다. 유년의 상처와 미숙함이 아닌, 내가 사랑했던 사람, 사랑을 가르쳐준 것들과 이별해야 한다. 잊어서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서가 이유라는 게 너무도 애석하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음악에 기대어 운 영화가 몇 편인지 모른다. 화려하지 않은 화면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에 운 장면은 열에 아홉, 그의 소리였다.

그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음악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 병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그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차분하게, 서두르지 않고 단어를 골라 말하는 모습은 내가 그때까지 누군지 모른 채 ‘닮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른의 모습이었다. 알지 못해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는 세상을 배려하는 어른이었다.

지난 12월 11일, 그의 공연이 열렸다. 요즘에야 ‘온라인 콘서트’라는 것이 흔해져 공연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던 것일 텐데, 전과 같으면 사실상 ‘실황’에 가까운 영상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히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공연일 거라고 했다.

그는 2014년 암을 진단받고 투병을 이어왔다. 작년 여름, 6월 7일에는 한 문예지를 통해 시한부 판정을 받았음을 밝혔다. 그때 한국에서는 영화 <애프터 양>이 처음 개봉하여 상영 중이었는데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그 영화를 보러 갈 정도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서정적인 피아노 음악이 흘러나와 또 울고 만 장면이 있었다. 찾아보니 또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이었다. 그러고 이틀 뒤, 그가 반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란 소식을 접한 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라이브로 공연을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수개월에 걸쳐 나누어 녹화한 걸 한 흐름처럼 모아 상영한 공연이었다. 그가 아주 오랜만에 연주하는 곡도, 새로운 느낌으로 들려주는 곡도 있다고 했다. 영상은 내내 흑백이었다. 혹자가 너무 야윈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리기 위해 색을 뺀 것이 아니냐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여전히, 여전한 그가, 똑같이 아름다운 음악을 가진 사람이 얼마 후면 세상을 떠난다니. 그러지 않을 수도 있고, 그가 가진 시간이 최대한으로 늘어지길 간절히 바라지만 어찌 됐든 이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을 거란 게 정말, 너무, 슬펐다. 죽음을 목전에 둔 채 살아서 마지막일 공연을 준비하고, 만들고, 연주하는 심경이 어땠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마지막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의 음악을 듣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안부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어 감사했다.

1952년 1월 17일 태어난 사카모토 류이치는 2023년 1월 17일, 아마도 그가 마지막으로 발매하는 앨범일 [12]를 선보였다. 어느 곡은 광활한 앰비언트 사운드로 채워져 있기도 하고, 어느 곡은 하나하나 몰아 쉬는 숨과 또박또박한 피아노 소리가 묻어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위에 뜰 때마다 게시글을 차분히 들여다본다. 아, 아니구나. 괜찮으시구나- 안도한다. 그가 만든 작품은 영원히 아름다울 텐데, 그걸 만든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무엇이 되든, 누가 되든 참 슬프고 외롭다. 시간은 아픔을 회복할 여유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겐 비밀일 이별을 향해 내달린다. 어쩌다 이별을 예고받아 준비할 시간을 갖는다면 떠남을 기다리면서 끝없는 슬픔을 겪지만 때로는 ‘운이 좋다’는 감상마저 든다.

이별을 모르던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다. 서너 시간 차를 타고 달려 향한 할머니네 집 대문을 열면 들리던 ‘우리 강아지 왔어’하는 소리가 그립고, 엄마 손을 잡고 갔던 놀이동산이 그립고, 아빠와 거실에 앉아 투닥대던 때가 그립다. 대사까지 외워버린 영화를 보고 매일같이 울던 때가 그립고, 어린 시절 상처를 이야기하는 노래에 울던 때가 그립다. 가닿지 못해도 좋다며 열심히 사랑하던 마음이 그립다. 앞으로 이별할 것, 그리워할 것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아직 삶의 반도 못 산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막막함이 먼저 찾아온다. 미련 많은 내게 이별을 배우는 법을 알려준다면 어디든 찾아가 귀 기울일 텐데.

ps. 문득 우리가 이백 번째로 보내는 알림이란 것을 깨달았다. 메일함 어딘가에 우리의 구석을 내어주셨다는 게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잠들기 전, 또는 출퇴근길, 등하굣길, 포근한 이불 속, 어디든 당신만의 생각을 매듭지을 수 있는 무언가가 됐길 바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움직였던 문장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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