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의 <머물러요, 이곳에서>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친구가 오후 네 시쯤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아쉬움에 답장하고 집에 들어온 순간, 청결하지 않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현관에 둔 쓰레기봉투에서 나는 건지, 어제부터 미뤄둔 설거지 더미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목격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미뤄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추측할 수 있다. 내 손으로 어지른 것과 어지르지 않은 것이 산재한 거실과 방과 부엌을 보고 있자면 다시 현관문으로 나가 엘리베이터 일 층을 눌러 달아나 버리고만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태초로 돌아가서 보면 사실 이 모든 건 내가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집안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세 아이의 탄생마저도.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엄마들은 대개 집을 정돈한다. 부지런한 인간이 아닌 데다가 최우선의 일일수록 저만치 뒤에다 밀어두는 이 무책임한 인간은 오전의 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쓰기로 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막내와 함께 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지만, 구차한 변명거리조차 사라진 지금은 혼자인 시간에 집안의 일을 관망하는 게 마치 죄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차라리 집에 들어오지 않기를 택한 것이다. 열두 시까지 나는 산책하고, 커피를 마시고, 생각을 한다.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여유만으로도 나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쓰는 시간이 이토록 간절한 것인지 누워만 지낼 땐 알지 못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오후를 맞아 돌아온 집안은 언제나처럼 부산스럽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다. 며칠만 관심을 두지 않아도 금세 티가 난다. 그러나 관심을 준다고 무언가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의 무력함은 주부로서 여간 곤란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집안일은 정말 끝이란 게 없다. 끝나지 않는다. 끝날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가사 일을 외면하는 시간이야말로 나는 비로소 나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날에는 드디어 각성하게 됐다. 미성숙한 존재들이 어른이 되는 날까지 녀석들 몫의 집안일을 해내야만 한다면, 그러다 늙어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자면 어릴 적부터 꿈꿨던 엄마라는 정체성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답지 않게 내 일을 꾸역꾸역 수행해 내는 이유는, 자신의 일상을 돌볼 줄 아는 사람으로 우리 아이들이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니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꾸역꾸역 애쓰고 있다.

해야만 하는 일과 하기 싫은 일과 나의 마음은 절대 합치될 수 없다. 그래서 지치지 않기 위해 나를 위한 시간을 쓰기로 한다.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죄책감을 동반하면서도 뻔뻔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동네에 (사실 동네라기에는 조금 걸어야 한다) 좋아하는 공간이 생겼다. 채도와 조도가 낮고, 명암의 대비가 모호한. 볕이 잘 들지 않는데, 볕을 볼 수 있는 곳. 눈앞엔 초록이 파이란 곳. 나뭇잎이 반짝거리는 걸 볼 수 있다. 일찍부터 문을 열고, 늦은 밤이 되기 전에 문 닫으며, 나무로 된 가구로만 구성되어 있어 눈이 편안하다. 무엇보다 커피가 맛있는데, 균형이 잘 잡혀있는 아메리카노에, 산미가 필요할 때는 콜드브루를 마실 수 있어서 좋다. 많지 않지만, 적재적소로 나열되어 있는 단정한 메뉴판에 디카페인 옵션. 더구나 블렌더 음료는 취급하지 않는다. 소음이 생길 일이 없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흘러나오는 음악의 볼륨은 심심하지도 않고, 신경이 쓰이지도 않아서 일에 집중이 잘 된다.

마지막으로 사장님의 친절이 지나치지 않아서 좋다.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만족감은 아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므로.

한가로이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보일지 몰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엄마가 아닌 ‘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영상 작업일 때도, 문장의 수집일 때도, 나만을 위한 쇼핑일 때도, 어떤 날에는 그저 멍하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일 때도 있다.

늘 카페의 전면 창 앞자리에 앉아서 거리의 사람들을 본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는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나’의 시간은 잠시 멈추고, 아이의 시간으로만 흐른다. 시계는 부지런히 간다. 한때 내가 머물던 곳들은 내가 없는 동안에도 무르익어간다. 함께 하던 사람들은 그대로이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면서 모습을 바꾼다. 예전처럼 일일이 관심을 두고 싶지만, 정작 내 얼굴 한 번도 보기 벅찬 날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양껏 모르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과분하고 충분한 기분이 된다. 눈멀어버린 장님도 아니면서 다시 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남편의 이직으로 이곳에 온 지 어엇 5년. 드디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았다. 덕분에 들떠서 자주 발걸음하게 된다. ‘머무는 모두가 화목하고 평온함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문장이 공간의 곳곳에 주문처럼 적혀있다. 적어도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의 목적은 내가 달성해 준 셈이다. 이곳에서 나는 엄마인 나를 잠시 지운다.

카페를 오가는 길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고,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물거나 자르지 않은 천 원짜리 김밥을 베어 물던 시절과 다름없을 수 있다. 기다려달라고 부탁하지 않더라도 내 걸음 속도에 맞춰 걸을 수 있고, 잠시 느려질 수 있으며,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서 숨이 가빠지지 않을 수 있다.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지 않더라도, 몰래 화장실에 숨어들지 않더라도 천천히, 아주 느리게 호흡할 수 있다.

영화학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를 본다’의 정의를 좋아한다. 러닝타임이 전부가 아니라 영화의 정보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보는 순간으로 볼 것이냐,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을 나서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는 영화 후의 시간마저도 감상의 범주 안에 둘 수 있는가. 나는 두고두고 내 안에 남아, 감상을 안고 살아가는 마저도 역시 영화를 보는 방식이라고 여겨왔다. 그런 의미에서 <화평화>의 탄생부터 카페에 가는 길, 머무는 시간과 함께 이야기 나눈 사람들의 기억.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전부 내게는 주요하게 느껴진다.

사랑이 많지만, 쉽게 사랑해버리지 못하는 인간인 내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의 발견이야말로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공간을 만드는 사람은 과연 그 사실을 알까. 카페가 사라진 후에도 당신들이 만든 공간이 누군가에게 영영 남아 생을 지탱하기도 한다는 걸.

(적어도 그정도의 책임감이나 애정을 가진 사람이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친구는 오후 네 시에 비행기를 타고 다시 호주로 간다.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한다.

“ 현실로 돌아간다 ”

한국에서의 현실이 싫어서 호주라는 이상을 택한 그녀가 호주로 돌아가며 한다는 말이 현실로 돌아간다니. 삼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시간이 이상이 되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닐 텐데,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를 꿈꾸던 나와 엄마로 살고 있는 내 현실도 뭐 녀석과 퍽 다르지 않아 실소가 새어나온다. 신발을 구겨 신었다. 이상과 현실은 결국 어딘가 겹쳐 있고,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라 부를 만한 순간을 축적해 나가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반쪽짜리 가현이와 반쪽짜리 엄마는 결국 하나다. 오전의 카페와 오후의 집은 곧 나의 하루다. 여전히 내게는 이상인 호주와 당장의 현실인 한국은 둥글게 바지런히 공존하고 공전한다. 돌고 돈다. 마침내 모호해진 경계 위에서 당최 어디로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산책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어떤 모습이 더 ‘나’ 같은지 더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내가 나라서 좋다고 생각한다.

어디서든 내가 나일 수 있고, 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내 목소리, 내 안의 욕망에 귀 기울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이리도 소중하다. 분명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중심을 맞춰서 걷고 있기 때문에 내 안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단 걸 안다. 오로지 내 행복이 유지되는 데에도 모두 각자의 임무를 다하고 있음을 기억하려고 한다.

울면서도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아이들과 그 녀석들을 품에 안아주시는 선생님들과. 내가 카페에 있는 시간에도 열심히 노동하는 소년과, 내가 마실 커피를 내리며 자리를 지키는 카페 사장님조차도. 만나는 사람마다 다정하므로 내가 따뜻할 수 있다.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온 우주의 보살핌을 받기 때문이란 걸 이제는 안다. 귀하게 살고 싶다. 매 번 말하지만, 갚을 게 너무나 많은 삶이다. 그러다 어릴 적의 꿈처럼 좋은 사람이 된다면, 틀림없이 좋은 엄마도 될 수 있으리라.

화목하고도 평온한. 꿈을 이루고 싶게 만드는 공간이 또 하나 생겨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