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의 ⌜일과 자신과 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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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역이었나.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열리고 있는 스크린 도어에 눈길이 갔다. 열차 밖으로 축축 쏟아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지붕이 없는 플랫폼에서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비가 오면 빨래가 마르지 않아서 불행했다. 욕심에 큰 침대를 들였더니 눅눅한 날엔 이불이 물을 먹는 게 화가 나고 슬펐다. 그날도 탈수를 두 번이나 한 베개 커버를 개운히 말리고 싶어 다리미를 꺼냈다. 달궈진 다리미가 지나는 자리마다 원래 색을 찾아가는 것이 그제야 만족스러웠다. 동시에 문득, 치마를 다려주던 엄마 생각이 났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아침이었고, 여태 교복 치마가 마르지 않아 엄마한테 화를 냈다. 엄마는 다림질을 하면서 내 치마를 말렸고, 나는 눅눅한 치마를 입고 짜증이 난 채로 등교를 했다.  

지난 12월엔 보행자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회전하던 차량에 받혔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현장으로 달려온 엄마가 먼저 한 말은 자기가 불러내서 내가 길에서 사고가 났다고,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엄마는 나를 무섭게 사랑한다. 상상해 보지 못한 마음에 놀라서 울었다. 나는 그가 준 억겁의 사랑에 보답할 자신이 없다.

책임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하다가 그쳤다. 계약 기간이 정해진 가수 하나 맡는 것도 벅찬데, 누군가를 평생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단지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벽돌 중 딱 하나만큼의 역할만 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모두들 어떻게 책임지면서 살고 있는 건지 정말로…… 내가 모든 것을 망쳐버릴까 겁이 나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그만두지 못했다. 마치 산불피해로 인민가에 출몰한 오랑우탄이 억지로 생포되어 다시 돌려보내지는 것처럼 나는 삶과 일에서 도망치는 것에 계속해서 실패한다. ‘버틴다’는 기분은 누가 칼로 종아리를 한 줄씩 적적 긁는 것 같다. 독감에 걸려 종일 훌쩍이며 운 것 같은 기분으로 일을 한 날도 나는 소거법에 의해 최후에 남는 건 ‘나’가 아니라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용한 것들에 마음이 간다. 식물을 키우고, 피규어를 사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칭찬을 건네고, 우동가게 직원의 앞치마에 가려진 프린팅 티셔츠의 캐릭터를 궁금해하고, 언젠가 누구에게라도 선물할 것을 사고, 알려지지 않을 시를 쓰고, 내가 먹으려고 산 빵을 남긴다. 가치를 증명하거나 보답할 필요 없이, 욕심이 생기지 않을 것만 만진다. 그래야 울지 않는다. 

확고한 힘듦이 내 옆에 누워있다. 등을 끄고 온수 매트에 귀를 대 물 데워지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더 이상 축축해지지 않으려고 제습기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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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와 숫자들 - 평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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